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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사량 단편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

by 언덕에서 2015. 3. 10.

 

 

김사량 단편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

 

 

재일교포 작가 김사량(金史良, 1914 ~ 1950)이 쓴 단편소설로 1940년 발표되었다. 국내에는 <빛 속에> 또는 <광명 속에(光の中に)>라는 제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작품빛 속으로(光の中に)(문예수도, 1939)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체념과 이에 굽히지 않는 민족의식을 보여준 결과로 김사량은 일약 일본 내 인기작가가 되었다.

 김사량은 주로 일본어로 소설을 썼는데, <기자림(箕子林)><산신(山神)들>의 작품에서는 한국 농촌의 하층민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1940년에 발표한 이 작품 「빛 속으로(光の中に)」으로 일본의 [아쿠다가와 상(芥川賞)] 후보작에까지 올랐으나, 탈락되었다. 그 뒤 <천마><무궁일가> 등의 일어 소설을 쓰고, 1935년 <광명 속에>, 1942년 <고향>이라는 일어창작집을 내놓았다.

 이 작품을 발표한 후 일본군 보도반원으로 북부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거기서 연안으로 탈출, 팔로군의 조선의용군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던 그는 1945년 2월 '조선출신 학도병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길에 탈출을 감행한다. 애초 옌안을 목표로 했던 그는 방향을 바꾸어 그해 5월 말 중국 북동부의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하여 조선독립의용군에 참가하려다 해방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1945년 10월 평양으로 들어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사량은 북한의 인민군 진군에 종군 작가로서 참가하였는데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갑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패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사량은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결국 원주 근처 산중에서 퇴각 진열로부터 낙오되었다. 전우에게 아껴쓰던 만년필을 유물로 주며 그것을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1950년 9월 17일 그가 남긴 종군기 『바다가 보인다』를 마지막으로 그는 영원히 행방불명되었다.

 

김학철, 김사량 등이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제국대학 학생으로 빈민가의 노동자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에 나온 남 선생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일본 아이들이 자신을 내지인으로 알고 미나미 선생으로 부르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기보다 내심 편안함을 느끼면서 조금 갈등하는 정도였다. 아이들 중에 유별나고 정서가 불안정한 야마다 하루오가 있는데, 그 아이는 남 선생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사실 하루오는 조선인 어머니 정순과 일본인 야마다 한베에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던 것이다. 하루오는 자신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조선인을 미워해야 한다는 자의식에 잡혀 있었다.

 하루오의 아버지 야마다 한베에는 거칠게 살아온 건달로 조선인 아내를 천대하고 폭행하면서 데리고 살았다. 그들의 이웃으로 빈민가에 사는 조선인 노동자 이군은 남 선생이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 화를 냈고 가엾은 조선 여인 정순을 학대하는 일본인 야마다나 그 아들 하루오를 모두 미워한다. 일본인 남편의 칼에 찔린 정순이 빈민 구호병원에 실려 오고, 남 선생은 그녀의 남편이 얼마 전 예비검속으로 구류 당했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함께 지낸 야마다 한베에라는 걸 알게 된다.

 나중에 남 선생은 여자에게서 야마다 역시 조선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혼혈아였음을 알게 된다. 하루오의 갈등이 깊어지면 아이는 제 아비처럼 비뚤어진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터였다. 나는 조센징이 아니라고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소년 하루오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따스한 숨결이 고동쳤다.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이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조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쫓아다녔다. 그것은 ‘어머니의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그리움일 것이다.” 결말에서 하루오는 이 다음에 무용가가 되고 싶다면서 환한 조명 불빛 아래서 춤을 추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은폐되고 일그러진 정체성을 그야말로 빛 속에 드러내어 당당해지고 싶다는 선언이다.

 

 

소설가 김사량 (1914 ~ 1950)

 

 

 이 작품은 서울의 하숙집에서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하룻밤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단편으로 1940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물론 그가 수상 후보가 되었던 데는 미묘한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조선작가가 일본어로 쓴 소설을 주목해줄 필요가 있었을 테고, 다른 하나는 일본 지식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버린 ‘타자’의 존재에 대하여 놀랐다.

 김사량은 1943년 [국민문학]지에 장편 <태백산맥>을 연재하였는데, 이 작품은 조선말의 격동기에 난리를 피해 화전민이 된 한 집단이 험준한 태백산맥의 연봉에서 펼치는 대로망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젊은이의 정의감, 격동의 시대 분위기에 알맞은 화적들의 날뜀과 사이비 교도들의 음모, 그리고 대자연의 맹위가 젊은이의 청순한 사랑과 어울려 힘차게 그렸다.

 

 

 김사량은 이 작품을 발표한 후 일본군 보도반원으로 북부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거기서 연안으로 탈출, 팔로군의 조선의용군에 종군기자로 참여했으며, 광복 후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종군작가로 종군, 후퇴 당시 강원도에서 전사했다.

 김사량은 오랫동안 남과 북에서 제외되고 잊혀진 작가였다. 1973년 재일 문학가들에 의해 일어판으로 <김사량 전집> 5권이 출판되었고 1987년에 북에서, 그리고 1989년에 남에서 뒤늦게 그의 작품집이 나왔다. 김사량은 재일동포가 아니며 일제 말의 중국 망명과 해방 이후 월북, 전쟁 참여와 행방불명 등으로 극적인 현대사의 폭풍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남도 북도 아닌 재일작가들이었다.

 

 

 

  1. 김사량(1914 ~ 1950) : 소설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일문소설(日文小說)을 썼다. 본명은 시창(時昌).주물공장(鑄物工場)을 운영하는 보수적인 아버지와 가톨릭을 믿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광주학생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반일시위(反日示威)에 연루되어 쫓겼었고,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을 벌이다가 1931년에 퇴학당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佑賀] 고등학교를 거쳐 1936년 도쿄제국대학 독문학과에 입학, 학우들과 함께 문학동인지 〈제방 堤坊〉을 펴냈다. 이 잡지 제2호에 평양의 빈민지대를 배경으로 일제의 수탈을 그린 〈토성랑 土城廊〉을 일본어로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재일 조선인 연극단 조선예술좌에서 이 작품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1936년 10월 2개월 구류처분을 받았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잠시 근무한 뒤, 1939년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모던 일본사의 부탁으로 조선어판 편집에 참여해 이광수의 소설 〈무명 無明〉 등을 번역하고, 1940년에는 강원도 화전민 실태조사에 참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때 예비검속으로 50일간 구금되었다가 1942년 2월에 귀국한 뒤 평양에 머물며 소설창작에 전념했는데, 장편 〈태백산맥〉(국민문학, 1943. 2~10)은 이때 쓴 작품이다.1944년 평양에 있는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고, 다음해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노천명 등과 중국에 파견되었을 때 연안으로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담한 이후에는 모든 작품을 우리말로 썼다. 8·15해방 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강사, 북조선예술가총연맹 국제문화국장, 평안남도 예술연맹위원장 등 북한문화예술운동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다. 1950년 종군작가로 참여했다가 남한강 근처에서 심장병이 발작해 낙오된 뒤 유격대로 전사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