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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완서 단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by 언덕에서 2015. 2. 9.

 

 

박완서 단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박완서(朴婉緖, 1931 ~ 2011)의 단편소설로 계간지 [상상] 1993년 가을호에 발표되었다.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동서 간의 전화를 통해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으며, 일인 모노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김현승의 시 <눈물>중 한 부분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순수한 슬픔의 정서인 눈물이다.

 백치인 아들을 간병하는 한 어머니를 보며 비록 식물인간일망정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를 부러워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자는 또 하나의 위선을 벗어낸다.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고 민주투사가 된 장한 어머니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길 수 없는 슬픔을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의 모습이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이 세상의 비정함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朴婉緖, 1931 ~ 2011)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대학생 아들을 잃고 친구와 가족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나’는 손위 동서와 통화를 하면서 아들에 걸었던 자신의 삶, 아들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아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동창의 집으로 이끈다. 동창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하반신이 마비된 데다 치매까지 겪는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한 지 오래됐다.

 동창은 ‘나’가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아이구 이 웬수, 저놈의 대천지 웬수’라고 부르고, ‘나’가 사간 깡통 파인애플을 아들의 입에 넣어주며 ‘이 웬수야, 어서 처먹고 뒈져라’라고 말한다.

 동창은 아들을 공기 굴리듯 굴린다. 욕창이 생길까 봐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는 일이란다. ‘아이고, 웬수 무겁기도 해라. 천근이야, 천근. 니가 내 앞에서 뒈져야지 내가 널 두고 뒈져봐라, 나도 눈을 못 감겠지만 니 신세가 뭐가 되나.’ 악담도 지나치다.

 그런데 환자를 도우려고 ‘나’가 손을 내밀자 환자는 이상한 괴성을 지른다. 갑자기 난폭해져 미친 듯이 군다. 그러자 동창은 ‘이 웬수 덩어리가 또 효도하네’하며 ‘나’가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악만 남은 동창의 얼굴에 씩씩하고도 부드러운 자애를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손숙 모노드라마<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제목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이지? 찾아보니 제목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나의 가장 마지막까지 지닌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종’이란 단어는 박완서 작가가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란 시에서 따온 말이다.

 

눈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집 <김현승 시초>(1957)

 

 

 

 주인공은 먹고살 만큼의 연금을 남겨 준 남편 덕에 의식주 걱정하지 않고 있으며, 두 딸들도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한다. 그녀는 죽은 아들로 인해 친척,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이며 아들 또래의 출세에 배 아파하는 나약한 엄마가 아니다. 민가협에서 의식화된 엄마이다. 그렇다고 특별 대접받는 것도 싫다. 형님 아들이 잘난 것은 인정하지만 글쎄 80년대 학번이 공부만 했다는 것은 인간성이 의심스럽다.

 박완서 소설의 주인공이 통상 그렇듯 이 소설 역시 중산층이다. 1980년대에 운동권 시위 도중 쇠파이프를 맞아 죽은 아들의 어머니가 민가협이라는 단체에 가입하면서 의식이 바뀌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자끼리의 전화를 매개로 한, 가장 저급으로 인식되는 전달매체인 수다를 통해 무거운 주제를 감질나게 다룬 작가의 스토리 전개에 감탄하게 된다.

 

 

 이 소설은 후반부까지 주인공이 지금껏 추구해 왔던 중산층들의 가치가 아들의 죽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낱낱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화자는 예전에 중요한 것이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그런 주인공이 결국은 은하계의 광대무변함을 주문 삼아 자신의 고통을 무력화시키는 노력도 소용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맨 마지막의 통곡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참으로 질기디 질긴 목숨,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생때같은 아들을 졸지에 잃고 난 후 어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바리바리 모아 온 것들을 딸들 모르게 슬며시 버리는 것이 생활의 일과가 돼버린 그 어미에게 그래도 남아서, 가장 끝까지 남아서 그 해어질 대로 해어진 속을 또다시 후비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아들에 대한 기억, 그 사무친 육신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제 자식의 욕창 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에서 거친 욕을 해대는 여고 동창이 정말 부러웠을 것이다. 비록 욕창 난 식물인간 상태의 몸뚱이였지만 동창의 아들은 여하튼 살아 있었다. 이 얼마나 처절한 집착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성이란 고상한 언어로 치장하지만 모성이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의 본능이며 절규며 절절한 집착이다. 만약 인간, 아니 인류가 고상하기만 한 존재였다면 우리는 이제껏 결코 생존해 오지 못했을 것이고, 이전에 절멸되었을 것이다. 그 미쳐버릴 듯한 절절함과 애절함 자체는 우리를 이제껏 살아 있게 만든 유전자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해야겠다.

 1994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2012년 8월 연극으로 각색되어 배우 손숙이 어머니 역을 맡아 모노드라마로 장기간 공연되었다.

 


☞김현승(金顯承.1913∼1975) : 시인. 호 남풍(南風)ㆍ다형(茶兄).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생. 목사인 부친의 전근을 따라 평양(平壤)에 이주, 그 곳에서 숭실(崇實)중학과 숭실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교지에 투고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가 양주동(梁柱東)의 인정을 받아 [동아일보]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데뷔하여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침> <황혼> <새벽교실> 등을 계속 발표, 민족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나타내어 주목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ㆍ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박흡(朴洽)ㆍ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신문학(新文學)](계간)을 6집까지 발행,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간행하고, 1963년에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 1968년에 제3시집 <견고한 고독>, 1970년에 제4시집 <절대고독>을 간행하였다. 전북대 등의 강사를 거쳐 숭전대 교수 재직 중 사망.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동 상임위원 등 역임. 1974년 <김현승 시선집>을 출간했다. 1977년 광주 무등산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전라남도문화상, 서울시문화상(1973)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