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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동인 단편소설 『감자』

by 언덕에서 2015. 9. 30.

 

김동인 단편소설 『감자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단편소설로 1925년 [조선문단] 1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태형>, <명문> 등과 함께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로 소설가로서의 김동인의 위치를 확고히 해 준 작품이다. 단편소설 『감자』는 복녀라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여인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문학 평론가 조연현은 이른바 자연주의의 특징인 '환경 결정론'에 입각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환경 결정론'이란 주인공의 운명은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복녀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불우한 환경이 빚어낸 일종의 숙명으로, 그 운명은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최초의 부정은 타율적인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율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뛰어난 문학성, 사실주의와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 근대적 단편소설의 아버지 등의 칭호로 김동인은 찬사를 받곤 했다. 그러나 '민족문학' 계열의 문학인들은 김동인을 역사성이 결여된 작가라 하여 그의 문학작품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의무감이나 부담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김동인의 문학세계는 오히려 그 '가식 없는 탐미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의 문학정신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감자』와 『수정 비둘기』이다. 김동인이 평생 라이벌로 생각했던 이광수처럼 주인공을 내세워 설교를 하려 들지 않고, 또 주인공이 처한 극한상황에 대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논평을 유보한다. 인간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 사회의 온갖 가식과 위선적 도덕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장점이다.

 

1987년 강수연 주연 <감자>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농부의 딸인 복녀는 돈에 팔려 나이가 저보다 스무 살이나 더 되는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생활은 말이 아닌데다 남편은 게을러서, 기어코 평양 교외의 빈민굴로 밀려나와 구걸로써 목숨을 이어 가게 되었다.

 마침, 그 때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뒤끓어 평양부에서는 그 퇴치에 나섰다. 복녀도 그 인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복녀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송충이를 잡았다. 어떤 날 그녀는 몇몇 아낙네들이 감독과 더불어 웃고 놀며 소일하면서, 품삯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되지 않아 복녀도 감독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다른 아낙네처럼 놀아날 수가 있게 되었고, 정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을이 닥쳐왔을 때 복녀는 빈민굴 아낙네들을 본받아, 이번에는 중국인 감자밭에 감자를 도둑질하기 위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떤 밤이었다. 그녀는 감자한 광주리를 훔쳐서 막 일어나려는 찰나 중국인 왕서방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복녀는 중국인을 따라가서 몸을 허락하고 얼마간의 돈을 얻어 돌아왔다. 그 후부터 그녀의 집에까지 왕서방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들 부부의 생활에는 약간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복녀의 집에 왕서방이 오면 복녀의 남편은 복녀가 마음 놓고 몸을 팔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왕서방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 새로 색시를 사온 것이다. 복녀는 타오르는 질투를 참지 못해서 결혼식 날 왕서방을 찾아가서 저의 집으로 가기를 청했다. 이 때에 결혼식장은 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복녀는 손에 낫을 쥐고 대항하다가 피를 뿜고 죽어 갔다. 이 날 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의사에게 각각 30원과 20원씩을 주었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 갔다.

 

영화 [감자], 1968

 

 

 김동인의 작가정신은 김동인의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평양 부호의 차남인 그의 청년 시절은 그야말로 술과 여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매일 정오쯤 요리집에 출근하여 4차까지 돌다 새벽 4시쯤에 집에 돌아와 한잠 자고, 다시 정오쯤 해서 요리집에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여자관계 또한 복잡해서 아키코, 김산월, 김백옥, 김옥엽 등 애인이 열 명쯤에 달했다. 그는 이런 여자관계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김없이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 창작집 <여인>(삼문사.1932)

 이런 방탕생활이 절정에 달했던 1925년에 쓰인 작품이 바로 『감자』이고, 그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가졌던 자유로운 성 관념을 투영시켜 창조해낸 인물이 바로 『감자』의 주인공인 ‘복녀’이다.

 작가에게 있어 스스로의 본능을 솔직하게 표출하며 살아가는 것이 창작활동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하는 사실은 동인이 이러한 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한 가정의 지아비 노릇을 시작한 1930년 이후의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30년대 이후의 동인 작품의 대부분은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들로서, 그의 초기 작품에 비해 훨씬 문학성이 떨어지는 졸작들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평론가들은 『감자』의 주제를, '주인공 복녀를 통한 당시 사회의 타락상 고발'이나 '무절제한 성적 방탕과 비도덕성이 가져온 윤리적 교훈' 등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니 '교훈'이니 '고발'이니 하는 것들은 동인에게 전혀 부합될 수 없는 단어들이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할 때까지 오로지 탐미적인 작품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의 목적을 탐미적 쾌락에 두었고, 자신의 천재성에 자부심을 느끼며 자유분방한 생활과 창작활동을 했다. 일시적인 사회현상인 '하층민의 고통' 같은 개념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광수 교수는 작가 김동인이 이 소설 『감자』를 통해서, 섹스가 얼마나 무서운 힘으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섹스를 통한 완벽한 오르가슴에의 도달을 억압하는 일체의 제도나 도덕 따위의 허울들을 비웃고 있다고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나의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줄 만한 부분이 본문 안에 나온다. 복녀는 송충이잡이를 하다가 감독관과 섹스를 하고 난 후에 '이것이야말로 소위 삼박자'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일 안하고 돈 더 받고, 스릴과 긴장감 넘치는 쾌감이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리하여 복녀는 "처음으로 한 개의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신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복녀의 남편은 20년이나 연상이며 따라서 복녀는 남편을 통해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감독관에 의해 처음으로 만족스런 섹스를 한 것이 그녀에게 '드디어 사람이 된 것 같은 만족감'을 안겨준 것이다. 게다가 빌어먹는 것보다 몸 파는 것이 더 점잖다는 표현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의 성적 본능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동인은 인간의 성본능을 금기시하는 유교적 사회의 모럴을 통렬히 비꼬면서, 복녀를 구습 타파의 상징적 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이후로 복녀에게 있어 섹스는 먹기 위한 돈벌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쾌락을 주는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뒤에 만난 왕서방과의 섹스를 통하여 단지 1, 2원의 돈보다는 더 큰 기쁨을 얻었던 것이며, 이것이 왕서방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 때문에 빚어진 '한밤의 활극'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마광수 저.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 읽기> 42 ~43쪽.」


☞(金東仁.1900.10.2∼1951.1.5) 소설가. 호 금동(琴童)ㆍ금동인(琴童人)ㆍ춘사(春士). 창씨명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양 진석동(眞石洞)에서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카와바타(川端畵塾)미술학교에서 화가가 되고자 미술 수업을 했다. 1919년 2월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요코하마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자비(自費)로 출간, 여기에 우리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그는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쓰기에 전심하다가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리고 만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군(皇軍)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1944년 친일소설(親日小說)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눕는 바람에 중단하고, 6ㆍ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성동구 홍익동 353번지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김동인문학비 동상이 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져 있다.그는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