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公無渡河(공무도하)
公竟渡河(공경도하)
墮河而死(타하이사)
當奈公何(당내공하)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예 강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으시니
이 일을 어찌 할거나
- <해동역사 권47. 예문지6. 본국시1> -
이 노래는 일찍이 중국에까지 전해져 이백(李白)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차운(次韻)하기도 했던 고대 가요이다. 작품명으로는 <공무도하가>, 악곡명으로는 <공후인>이라고 한다.
출전은 <해동역사>. <해동역사>는 조선 정조 때 한치윤1(韓致奫.1765∼1814)이 중국 사료 525종과 일본 사료 22종에 수록된 한국 관계 사료를 분석 편집한 70권과 그의 조카인 한진서2(韓鎭書)가 추가한 15권의 지리고가 종합된 역사서. 이 책에 이 노래와 설화가 전하는데 중국의 晉 나라 때 최표(崔豹)가 지은 <고금주(古今注)>에서 옮겼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출전을 <고금주>로 잡기도 하는데, 근래 한 중국인 한국문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금주>에는 이 노래의 가사는 물론 설화도 실려 있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한치윤의 기록에 잘못이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출처도 찾을 수 없으므로 출전을 <해동역사>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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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갈 때 한 머리 센 미친 이(백수광부 : 白首狂夫)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들고 물을 거슬러 건너는데, 뒤따르는 그의 아내가 말려도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그 늙은이는 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이에 그의 아내가 공후4(箜篌)를 가지고 공무도하의 노래를 부르니 마디마디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고 그도 또한 몸을 물에 던져 목숨을 끊었다. 자고가 집에 돌아와서 아내 여옥(麗玉)에게 아침에 본 그 광경을 이야기해 주고, 또한 그 노래를 들려 주었다. 이를 들은 여옥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벽에 걸린 공후를 끌어안고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여옥은 옆집에 살고 있는 여용(麗容)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한 노래 이름을 <공후인(箜篌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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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화는 노래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로 더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설명도 노래를 바탕으로 해야 하겠다. 이 내용은 중국의 채옹5이라는 사람이 지은 <금조(琴操)>에 전하는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송나라 때 문헌인 곽무청의 <악부시집6(樂府詩集)>에는 노래만 전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물을 건너다 죽은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니 죽은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동안 논란이 매우 많았는데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당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짓을 하면서 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신들린 무당의 모습이라야 어울린다. 그런데 이 무당은 실패한 무당이다. 강물에 들어가 죽음을 이기고 무엇인가 재생을 이루는 의식(죽음의 신비 체험에 의한 자기 변용)을 거행하던 중에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제를 이루면서 나라 무당으로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무당이 불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따라서 권위를 상실한 무당이 결국은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르던 아내도 실은 무당이라고 볼 수 있다. 굿노래에 한 섞인 넋두리를 보탠 것이 아닌가?
또 다른 견해는 신화적 해석방법으로서 백수(白首)는 신선의 모습이므로 백수광부를 주신(酒神)으로, 그의 아내를 강물의 요정인 님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백수광부를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7(Dionysos)나 로마 신화의 바카스(Bacchus)로, 아내를 악신(樂神, Nymph의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석상의 이견이 분분한 것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조선(朝鮮)'이 어디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우리의 고조선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 중국의 조선현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어 주목된다. 이 지명의 문제는 이 노래 혹은 설화가 우리의 것이냐, 아니면 중국의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지만 당시 고조선의 영역을 고찰할 때에 '조선'이 우리의 영토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수긍이 간다. 그리고 최근의 견해는 분명 조선은 중국에 있던 조선현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곳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의 비극적 이야기라는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등장인물에 대한 논의를 마친다면 남은 문제는 삽입가요에 대한 문제이다. 과거에는 노래명에서도 이견이 있었으나 현재는 '공무도하가'는 시가에 대한 명칭으로, '공후인'은 악곡에 대한 명칭으로 일반화되어 있다(현행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공후인'으로 되어 있다). 작자의 문제는 중국의 문헌에는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작자는 백수광부의 아내로 잡고, 여옥은 단지 노래를 전사(轉寫)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남편의 죽음을 당하여 어떻게 부인이 노래를 지을 수 있는가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도 있으나 설화의 문맥에 의하여 작자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이 설화의 구조를 보자. 이 설화는 두 쌍의 부부가 그 축으로 되어 있다. 즉 강에 빠져 죽은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 그 광경을 본 곽리자고와 그의 아내 여옥, 이렇게 두 쌍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백수광부 : 곽리자고 = 백수광부의 처 : 여옥’으로 대응되고 있다. 결국은 동일한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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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조그만 강이 흐르는 강원도 횡성의 아담한 마을이 배경이다.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는 어딜 가든 고운 빛깔의 커플 한복을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다.
이들은 봄에는 꽃을 꺾어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고, 여름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엔 낙엽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한다. 세상의 풍상을 다 겪어 이제는 매사에 초연해져 순진하기까지 한 백발의 노부부다.
장성한 자녀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 ‘꼬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가 꼬마를 묻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간다.
비가 내리는 마당, 점점 더 잦아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던 할머니는 친구를 잃고 홀로 남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머지않아 다가올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한다.
노부부의 생일, 생일상 앞에서 장성한 6명의 자식들은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서로에게 손가락질 하며 격하게 싸운다. 노부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말이 없다.
눈 내린 무덤가,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무덤 옆에서 할아버지가 입던 옷을 태우며 통곡을 한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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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았다. 76년 동안 해로(偕老)하다 98세에 타계한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인 노부부의 사랑과 사별을 사실 그대로 담은 영화로, 오늘까지 누적 관객이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상업적인 극영화의 1000만 명보다 더 많은 것으로 치는 ‘독립영화 100만 관객’을 최단기간에 돌파하는 등 새 기록을 여럿 세웠다. 나는 2011년 KBS TV ‘인간극장 5부작 - 백발의 연인’을 보았고, 영화 관람평을 여러번 들었기에 나름대로 스토리 전개 등을 짐작하고 있었던 탓에 극단적인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마 '백발의 연인'을 사전에 보지 않았다면 나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끝없이 울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처음 소개될 당시엔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공무도하가’의 한 대목을 제목으로 내세운 탓인지 청·장·노년층을 막론하고 감동에 젖게 하고 있다.
“사랑 자체의 위대함을 절절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의 힘이 있다. 한국 영화의 대명사였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질문에 ‘영원한 사랑도 있다’고 화답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은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걸로 기억한다. 영화의 메시지를 새삼 되새길 뿐만 아니라, 고대 시가를 포함한 고전은 무한한 창작과 창조의 모티브 또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김훈의 소설 '공무도하'도 그렇다. 상상력의 확장은 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 한치윤(韓致奫, 1765년~1814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대연(大淵)[1], 호는 옥유당(玉蕤堂)이다.1789년(정조 1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약관(若冠)에 문명(文名)이 출중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친척 형인 한치응(韓致應)을 따라가서 고증학의 실사구시의 학문 탐구 방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해동역사》를 저술하다가 〈지리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뒤에 조카 한진서가 7권을 더하여 완성하였다. [본문으로]
-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유경(酉敬). 치규(致奎)의 아들이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치윤(致奫)에게서 문학과 도덕을 배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현감을 지낸 일이 있다고 전하여진다. 1814년(순조 14) 치윤이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는 치윤의 유언으로 『해동역사』 원편의 초고를 정리하고 자료를 새로 수집하여 『지리고』 15권을 속찬(續撰), 1823년『해동역사』 총 85권을 완성하였다. [본문으로]
- 최장수: ‘고전문학’) [본문으로]
- '우리나라 고대 현악기의 하나. 사부(絲部) 또는 현명악기(絃鳴樂器, chordophone)에 드는 공후는 서양의 하프(harp)류의 일종이다. 중국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전하는 이야기 즉 고조선의 여옥(麗玉)이 [본문으로]
- 중국 후한의 문인. 자는 백개(伯喈). 진류(陳留) 어현(圉縣 :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치 현[杞縣] 남쪽)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박학했으며 태부(太傅) 호광(胡廣)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사장(辭章)·수술(數術)·천문(天文)을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 거문고를 잘 탔다. 170년(建寧 3) 낭중(郞中)을 하사받았다. 175년(熹平 4) 당계(堂谿)·양사(楊賜) 등과 함께 6경(六經)의 문자를 바로잡으려고 상주했으며, 직접 문장을 비에다 쓰고 장인에게 새기게 해서 태학(太學)의 문 밖에 세웠는데, 이것을 〈희평석경 熹平石經〉이라고 한다. 나중에 재이(災異)의 변에 관해 상주문을 올렸다가, 정황(程璜) 등에게 참소당하여 투옥된 뒤 멀리 쫓겨갔다. 그뒤 사면을 받았으나 강해(江海)로 망명하여 12년 동안 오(吳)나라에 머물렀다. 189년(中平 6) 사공(司空) 동탁(董卓)에게 불려가서 시어사(侍御史)·시서어사(侍書御史)·상서(尙書)를 지낸 뒤 파군(巴郡)의 태수가 되었으며, 시중(侍中)·좌중랑장(左中郞將)까지 지냈으나, 동탁이 죄를 받고 죽음을 당한 후 그도 옥사했다. 저서로는 〈독단 獨斷〉·〈석회 釋誨〉·〈채중랑집 蔡中郞集〉 등이 있다. [본문으로]
- ≪악부시집(樂府詩集)≫은 북송 곽무천(郭茂倩)이 편찬한 것으로, 시선집(詩選集)이나 사서(史書)에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던 선진(先秦)에서 당오대(唐五代)까지의 악부 문학을 성격과 용도, 시대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악부시 총집(總集)이다. [본문으로]
- 그리스·로마 종교에서 풍작과 식물의 성장을 담당하는 자연신. (영) Dionysus/Bacchus. 로마에서는 Liber라고도 함.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4편 325)에 따르면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시오도스 역시 신통기 940-942에서 세멜레를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로 전하고 있다. 이름의 어원은 디오스 (Διός, 제우스의 소유격) + 니소스 (νυσος - 학자에 따라 서는 σνυσος를 뒷뿌리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니소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치가 않다.디오니소스의 유래 장소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은 없다. 미케네 문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테베에서 숭배된 신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는 에게 해 연안의 고대 그리스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새로운 계절의 활력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8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 신화가 틀이 잡히면서 널리 알려지고, 디오니소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신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디오니소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날 주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박카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디오니소스는 풍요의 신으로 원래는 12신의 자리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화덕의 여신 헤스티아에게 12신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에 관한 유래가 많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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