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장편소설『리스본 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
스위스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 Peter Bieri, 1944 ~ 1993)가 쓴 장편소설로 2004년 발표되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은 베를린자유대학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작품으로 2004년 출간되어 23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심연을 파헤치는 의식의 추리물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일종의 ‘의식의 추리물’이다. 이 작품엔 보장된 인생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각자에게 맞는 섬세한 방식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더 나은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작가는 인생이 선명한 의식과 철학의 세계로 구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인생은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2004년 출간 이래 독일에서만 150만부를 판매, 현재까지 3년 연속 아마존 베스트셀러 10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23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철학교수를 세계적인 유명작가로 발돋움하게 해주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베른의 김나지움에서 고전언어학을 가르치는 57세의 이혼남이다. 이순을 코앞에 둔 그의 삶은 단조롭고 경직되어 있어 흡사 “박물관의 조형물” 같다. ‘문두스(세계·우주·하늘을 뜻하는 라틴어)’란 별명의 그는 시계처럼 정확하고 성실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생애 최초로 일탈을 감행한다. 출근길에 만난 낯선 여인이 자살을 감행하려들자 그는 몸을 던져 막는다. 놀랍게도 여인은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숫자를 적는다. 모국어가 뭐냐고 묻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여인은 “포르투게스”라고만 대답한다. 그 단어의 독특한 울림에 이끌린 그레고리우스는 돌연 일상에서 낯선 세계로 눈을 돌린다. 우연히 손에 넣은 포르투갈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들고서 일정도, 기한도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프라두의 흔적을 좇는다. 프라두는 살라자르 독재 정권 치하의 하수인이었던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 일로 오점을 남기고 반정부 저항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성실함과 충성, 우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으나 절친한 친구 조르지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어 몹시 고통스러워했던 인물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라두의 인생을 조합해나가면서 프라두라는 인물에 자신을 비춰보게 된다. 그리하여 40년 가까이 늘 한자리에 서 있던 자신을 비춰본다. 프라두는 존경받는 의사이자 은유에 능한 시인이며 고귀한 정신의 귀족이자 저항운동가였고 격정적인 사랑에 몸부림쳤던 이다. 경직된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 병적인 충성심으로 오빠 곁을 지켰던 아드리아나, 발끝으로 걷는 듯 자기 길을 찾아 간 멜로디, 프라두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친구 조르지. 그러나 이들은 모두 프라두의 페르소나2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구축해 놓은 사유의 제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간과한 인생의 다른 측면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프라두의 존재와 인생은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라두는 존재의 진실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그러한 깨달음은 프라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을 깨닫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로 결론짓는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던진 화두다. 작가는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묻는다.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질문이다.
이 작품은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독일 문학가 막스 프리쉬3의 작품과 비견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에서 일탈해 전혀 다른 삶을 좇아간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현실에 대한, 표현되지 못한 내면의 저항이 아닐까? 혹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미 만들어진 나를 다시 만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작가는 계속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묻는다.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질문이다.
작가는 프라두의 입을 빌려 글쓰기를 실존과 언어의 문제로 바라본다. 내가 인식하는 자아와 타인의 눈에 드러난 자아, 남이 말하는 나와 내가 말하는 나, 현재의 삶을 경험하는 나와 감추어진 삶을 지향하는 나 사이의 간극. 작가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점에서 그는 나보코프나 카프카와 비견된다. 그러나 현란한 은유와 지성의 언어로 사유의 세계를 넘나드는 대목은 움베르트 에코가 떠오를 정도다. 이는 메르시어가 오랫동안 언어와 철학의 문제에 천착해온 학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
작가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의 내면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라틴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는 그레고리우스의 고백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은 ‘언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기발하되 가벼운 요즘 소설과 뚜렷이 구별된다. 어쨌든 이 소설은 재미있다. 묵직한 표현이 작품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는데다, 정교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엇갈리는 ‘액자소설’ 형태인데 읽는 내내 ‘다음은, 다음은…’하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프라두의 족적을 따라 사유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로 결론짓는다.
작가는 프라두의 입을 빌어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라고 말한다. 그레고리우스를 리스본으로 이끌었다가 다시 삶의 터전인 베른으로 데려온 야간열차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의미하는 메타포4다. 여행은 길다. 모든 관계에 끝이 있듯이 인생이란 여정도 언젠가는 종착역에 닿는다. 여행의 시작과 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는 것,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마저 온전히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바로 존재의 아픔이기 때문일 것이다.
- 파스칼 메르시어 저서(총 5권)본명은 페터 비에리(Peter Bieri). 1944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출생한 작가이자 철학자. 베른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와 영국 런던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맥타가트의 시간철학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언어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소설을 집필할 때만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그는 『페를만의 침묵(1995)』, 『피아노 조율사(1998)』를 출간했으며 2004년에 출간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독일을 비롯 세계 15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2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6년에 독일의 ‘마리 루이제 카슈니츠 상’을, 2007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최고 외국어 소설에게 주는 ‘프레미오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 사람의 몸을 조각한 작품. [본문으로]
- 막스 프리쉬는 브레히트(B. Brecht) 이후 뒤렌마트(F. Durrenmatt)와 더불어 독일어권의 가장 대표적인 희곡 작가이자 소설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브레히트 연극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브레히트 연극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취리히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연극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리쉬는 연극의 경향성을 좇지 않았으며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의식까지 날카롭게 꼬집어 비판했다. 또한 “무대는 곧 인간의 정신세계”라고 생각하여 브레히트와는 달리 질문만 던질 뿐 이념에 대한 확신은 전달하지 않으려 했다.[네이버 지식백과] 막스 프리쉬 (해외저자사전, 2014. [본문으로]
-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 은유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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