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혹은 나무꾼
서양의 동화와 전설에 이런 유형의 이야기가 있지. 정직하고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이 화려한 성안으로 들어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귀부인과 결혼하게 된다는 유형 말이야. 그런 얘기의 끝은 언제나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지. 그러나 나는 그게 몹시 잘못된 거라고 봐. 도대체 어떻게 그리 되겠어? 나무꾼의 아들에게는 그가 자란 들판이나 숲속의 문화가 있고, 성안의 귀부인에게는 또 그녀 나름대로 몸에 밴 성안의 문화가 있어. 결혼을 할 정도의 나이라면 그들은 적어도 20년의 세월 서로 판이한 문화 속에서 그 몸을 기르고 정신을 만들어간 거야. 헌데 그들이 어떤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해서 그대로 행복하게 살리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느냐 말이야. 오히려 열에 아홉 그들은 불행하게 끝장을 보고 말았다고 추측하는 편이 옳아.
처음의 감격과 열정이 식으면서 나무꾼의 아들은 자기의 아내가 숲속의 어머니처럼 순종적이지도 헌신적이지도 않다는 데 불만을 품을 것이고, 귀부인은 귀부인대로 자기 남편이 아버지나 옛 구혼자처럼 강력하고 세련된 영주나 기사가 아닌 데 불만을 쌓아갈 거야. 그리하여 후회와 한탄 속에 나란히 늙어가거나, 원망과 미움으로 오래잖아 끝장을 보게 되는 게 그 대부분의 결말이겠지. 아무리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동화라 해도 도대체가 너무 엉터리야. 재부(財富)의 획득이나 사회적인 신분의 상승을 곧 행복으로 단정하는 어거지란 말이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서양의 동화가 아무런 비판 없이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되풀이 읽히고 있다는 점이야.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읽히어 수많은 아이들에게 비뚤어진 꿈을 심어주었고, 그 일부는 실제 삶에서 그 미신을 믿은 쓰디쓴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 그 따위 동화는 없애든가 고쳐 써야 돼. 적어도 그들이 행복해졌다고 단정하기 전에 상당한 단서는 꼭 붙여져야 한단 말이야. ‘만일 한쪽의 문화에 무사히 동화되었다면’ 또는 ‘두 문화가 이상적인 조화에 이르렀거나 최소한의 타협점이라도 찾았다면’ 하는 단서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쓴 또 다른 이야기가 계속된 뒤에 그들이 행복해졌다는 결말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지.
- 이문열 대하소설 <변경>2권, 186 ~ 188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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