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단편소설 『폴과 비르지니(Paul et Virginie)』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Jacques-Henri Bernardin de Saint-Pierre, 1737~1814)의 단편소설로 1787년 발표되었다. 처음에 <자연연구>(1784) 속의 한 에피소드로 쓴 것으로 이국적인 배경 속에 펼쳐지는 목가적인 작품이다. 작가가 일찍이 탐방한 일이 있는 ‘일 드 프랑스(현재의 모리셔스)’가 무대이다.
자연 속의 삶에서 폴과 비르지니는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자라나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프랑스 본토에 사는 부유한 친척 할머니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한 비르지니는 자연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홀로 문명의 세계에 들어선다. 자유롭게 살다가 감옥처럼 답답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다시 섬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난파되어 죽고 만다. 이 때 그녀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옷을 벗어 탈출했다면 살았겠지만 문명에 눈을 뜬 그녀는 결국 수치심에 굴복하고 창피함을 의식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
이 작품은 루소1의 자연철학에 영향 받은 생피에르의 감성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루소는 ‘자연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제도화되고 의식화된 모든 것들로부터 원초적이고 순수한 감성을 찾아 자연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에 의한 행복의 실현을 추구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인도양 한가운데 있는 섬인 일 드 프랑스에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섬에 라 투르 부인이라는 귀족이 흑인 여자 노예를 데리고 들어오게 되었다. 부인은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고, 게다가 유복자를 임신하고 있는 몸이었다. 라 투르 부인이 이 섬에 오기 전에 이 섬에는 마르그리트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귀족 남자에게 그만 속고 말아서, 폴이란 사내아이를 낳은 뒤 이 섬에 오게 되었다. 그녀는 이 섬에서 아들 폴과 남자 흑인 노예와 더불어 고요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라 투르 부인은 귀족이고 마르그리트는 평민이는 신분의 차이, 이것이 처음에는 약간의 장애가 되는 듯했으나, 그 두 여인은 곧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두 집에서 부리고 있는 노예들도 아무 스스럼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 섬에 올 때 유복자를 잉태한 채로 왔던 라 투르 부인은 달이 차서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고, 그 딸의 이름을 비르지니라고 지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폴과 비르지니는 남매처럼 사랑하면서 성장했다. 두 어머니들도 자기네 자식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비르지니가 성장하여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자, 본국에 있는 라 투르 부인의 백모가 그녀를 프랑스로 데려가려 했다. 그녀에게 정식 교육을 받게 하고 자기의 재산을 상속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라 투르 부인에게 섬의 신부는 꼭 보내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비르지니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주위에서 하도 권고하기 때문에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폴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여행길에 나섰다.
그리고 몇 해의 세월이 흘렀다. 비르지니는 폴에게 약속한 대로 이 섬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탄 배는 섬 가까이까지 와서 그만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고, 섬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섬까지 헤엄쳐 와서 구조를 받았다. 파선된 배와 섬과의 거리는 그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비르지니는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물에 빠져 숨지고 말았다.
죽은 그녀의 손에는 폴의 초상이 힘차게 꼭 쥐어져 있었다. 폴은 슬픔이 지나친 나머지 그녀의 뒤를 따라 자살하고 말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폴의 어머니 마르그리트와 비르지니의 어머니 라 투르 부인, 그리고 양가에 있던 노예들도 차례로 숨졌다. 그리하여 이 섬의 평화롭던 생활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줄거리다운 것도 거의 없다. 폴과 비르지니의 산책, 억수 같은 소나기, 이별의 비탄(悲嘆), '생-제랑' 호가 난파하는 폭풍우, 이런 것들이 사건의 전부이고 감동의 원동력이다. 수사(修辭)도 없다. 그러나 성실하고 강력한 인상주의가 있다. 부르봉 섬의 두세 개의 풍경, 하늘의 두세 개의 상태,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묘한 낱말들, 예컨대 캐비지야자(palmistes), 타타마크(tatamaques), 파파이아 나무(papayers) 등은, 프랑스 인의 상상력 앞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적인 하나의 자연을 고스란히 그려 보이고 있다.
♣
생피에르는 기계 문명에 반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여기에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단순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으나 이 작품의 매력은 그러한 철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대지방의 회화적 자연묘사와 청순한 연애의 아름다운 표현에 있다.
『폴과 비르지니』는 원시적 배경에서 엮어지는 순수한 목가적 삶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폴과 비르지니는 비슷하다. 그들은 현대 물질문명 사회와 동떨어져 문명에 오염되기 전의 자연 속에 살면서 기계 문명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외딴 섬에서 제도와 의식이 없고 자연과 선(善)만이 존재하는 생활을 통해 그들만의 하나의 작은 평등 사회를 묘사한다. 또한, 자연과의 친화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삶에 눌려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청량음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을 보면 너무나 천진하고 순박하여 수치심을 모른다. 문명사회에 살기에 체면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관찰자인 우리들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문명이 인간의 삶에서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므로 루소나 이 작가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사회의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간이 지닌 본연의 순수함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씁쓸한 이치를 돌이켜 보게 한 작품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Henri Bernardin de saint-Pierre.1737∼1814) : 프랑스의 소설가. 르아브르 출생. 어릴 때 <로빈슨 크루소>를 애독하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꿈꾸었으며, 실제로 마르티니크섬과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1771년 파리에서 루소를 알게 되었으며, 평생토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불우한 속에서도 저작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작품 중에서 <자연연구>(1784)가 성공을 거두자 일약 유명해졌다. 소설 <폴과 비르지니>(1787)는 원래 <자연연구>의 한 삽화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가 <자연연구>에서 의도한 것은, 뉴턴이나 뷔퐁이 한 것과 같은 관찰에 입각한 경험적 과학을 부정하려는 것으로서, 이 세계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인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루소는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표현된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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