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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일제가 들여오고 우리가 번성시킨 환락의 거리 『유곽의 역사』

by 언덕에서 2014. 8. 29.

 

일제가 들여오고 우리가 번성시킨 환락의 거리 『유곽의 역사』 

 

대형 서점에서 여러가지의 책을 읽으며 그 중 한 권을 고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월초 특이한 제목의 책이 눈에 띄어서 펼쳐보았는데 흥미진진하다기보다 무거운 내용이었다. 사회학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꽤 두꺼운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읽혀졌다. 

 1980년대 초반이었다. 친한 선배가 군 입대했는데 몇 달 후 편지가 왔다. 강제 징집된 그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1군 사령부 예하 부대에 배치 받았다. 그를 매우 존경했으므로 면회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원주역에서 내린 나는 소초면 이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탄 사람이 몇 되지 않아 앞자리에 앉은 두 군인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둘의 대화 내용은 '희망촌'에서의 가격이 얼마냐, 어떻더냐 하는 것이었는데 원주역 앞에 있는 사창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희망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동네가 사창가라니? 갑자기 '그룹 The Animals'가 부른 '해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희망촌'이라는 명칭의 그 연유가 궁금했으나 알 길은 없었다. 세상에는 별 희한한 이름을 한 동네도 있구나! 그런데 당시의 궁금증은 이 책을 읽으면서 대번에 해소되었다.

 원주역 건너편에 있는 설악추어탕과 역전건강원 뒤에는 강산정육점이라는 간판과 함께 빨간색 형광등 불빛이 보인다. 소위 말하는 원주 희망촌이다. 최근에는 이 골목 이름을 '광명마을'로 바꾸었다.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것이다. 희망촌에는 25개의 윤락업소가 밀집되어 있다. 마치 달동네를 올라가듯 좁은 언덕길을 따라 윤락업소들이 이어져 있다. 큰길 건너 모범약국 안쪽 역전시장 골목에 형성되어 있는 매화촌의 경우는 희망촌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다. 언뜻 보기에도 희망촌 업소보다 그 숫자가 2배 넘는 50여개 정도의 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 각 업소의 규모도 커서 희망촌이 1~2명의 성매매 여성들로 일하고 있다면 매화촌은 2~5명의 여성들이 일했다. 보통 희망촌과 매화촌을 합쳐서 '희매촌'이라고 부르지만 원주 사람들은 매화촌을 성매매 업소의 주류로, 희망촌을 그 아류로 분류한다. (155쪽)  

 야릇한 불빛 속에서 윙크와 함께 달콤한 말을 꺼내며 남자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여인들이 있는 거리를 우리는‘집창촌’이라고 부른다. 지역마다 집창 골목으로 유명한 거리가 하나쯤은 있을 만큼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집창촌이지만 도대체 그곳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이렇듯 유곽의 존재는 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1는,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된 집창촌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전국의 집창촌을 탐방하며 그 역사의 원류를 찾아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 대전 춘일정 유곽 1930년 (91쪽)

 

 1876년 일제가 들여온 부산 아미산 아래 유곽은 한때 아시아 최대의 매춘거리로 유명세를 탔다그곳을 완월동이라 부른다이 책은 그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곽의 역사를 짚고 있다우리의 집창촌 문화는 굴곡진 한국사의 흐름과 함께 시기마다 변모해가며 그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그러나 사회는 집창촌을 이용하는 동시에 부정하고비난함과 동시에 요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저자는 성매매를 옹호하지 않는다하지만 집창촌이 우리 삶의 한 터전이자 문화의 소비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역사를 알아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의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또한 그 성매매 문제를 인정하고 집창촌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지닐 때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민간 기생 '들병이' (27쪽)

 

 우리나라 집창촌의 역사는 한때 아시아 최대의 매춘거리로 유명세를 탔던 부산 완월동 집창촌의 전신인 아미산하 유곽부터 시작된다. 개항지를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긴 성매매 업소들이 성병 예방과 풍기문란 예방이라는 명목 하에 실시된 일본의 정책을 빌미로 점차 한 장소에 집중되어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첫 타자가 바로 아미산하 유곽이다.

 한때 일본인만을 위해 운영되었던 이들 유곽은 철도의 발달과 함께 점차 조선 전국에 뿌리를 내리며 식민지 착취로 인한 빈곤에 시달리던 여성들과 자본주의적 성매매에 눈뜬 남성들을 빨아들였다. 일제가 들여오고 우리가 번성시킨 환락의 거리인 셈이다. 저자는 성매매의 번성이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조선 사회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주며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애인의 돈 때문에 팔려간 여자들의 사연과 포주에게 학대당하는 성매매 여성들, 등굣길에 있는 집창촌으로 인한 아동 교육 문제, 곤궁한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호황을 누리는 유곽에 대한 개탄 등이 게재되어 있는 당시의 신문은 그 주장의 근거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인정한 공창과 불법업체인 사창은 성구매 남성과 성판매 여성 수 증가와 함께 날로 번성해가며 사회문화의 하나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유입된 집창촌 문화가 한국인들에 의해 환락의 날개를 펼친 것이다.

▲지난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자 이에 반발하는 완월동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이 법 폐지를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사진 페이퍼로드. (325쪽)

 

 저자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를 ‘사창전국시대’라 명명한다. 일본 유곽이 있었던 자리들이 재빨리 사창가로 전환되면서 일제시대에 집창촌을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창촌을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0년에 발발한 6.25도 성매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전쟁 때문에 더더욱 곤궁에 빠진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성 판매를 했고, 현실을 잊고 싶은 남성들은 성 구매에 열을 올렸다.

 집창촌의 토대가 마련된 마당에 경제발전에 나라의 미래를 건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상황은 더 우스꽝스럽게 변모해갔다. 겉으로는 ‘윤락행위 방지법’을 만들어 단속하는 척 하고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면서 뒤로는 집창촌을 ‘특정지역’이라는 단어로 묶어 성매매를 묵인한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공창 아닌 공창’을 운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앞서 호황을 누렸던 일본인들이 성매매 관광을 와 뿌리고 가는 돈이 곧바로 국가의 외화획득에 호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본 기생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며 흘러들어오는 외환으로 나라 살림을 챙겨나갔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미군 기지촌의 활성화 또한 ‘최대의 우방’인 미국과의 동맹의 상징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병예방과 반공사상, 영어 등을 교육하며 기지촌 거대화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창이 만연한 시절 미군 기지촌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던 군사정권의 미봉책일 것이다.

▲   1920년대 군산의 유곽.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게 느껴지는데, 지금의 명산시장 입구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73쪽)

 

 물론 이 시기의 경제성장이 기생관광 외화만으로 충당된 것은 아니다. 국가 주도 산업화와 함께 수출이 증대한 것이 ‘한강의 기적’의 절대적인 이유였다. 이 시기 모두가 꿈꾸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국민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지만 끊임없는 생산성 증대 압력과 경제성장 압박은 나라의 미래와 함께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 가장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가 될 뿐이었다. 별다른 놀이 문화가 없던 살벌한 나날들, 가장들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숨막히는 권력의 압제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성매매를 택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독재 정부가 ‘특정지역’을 만들면서 생겨난 암묵적 효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국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경제성장의 음지이자 파생상품으로 커간 집창촌은 1980년 이후의 5공화국 시절을 맞아 쿠데타를 가리려는 군부정권의 정책 아래 국민의 3S 서커스(Screen, Sports, Sex) 중 하나로 변모한다. 특히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규제가 완화되면서 산업형 성매매와 음성적 매매춘이 등장해 성매매는 그 등장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포주의 학대와 잇단 집창촌 화재 등으로 점철된 윤락가의 역사는 결국 2004년 ‘성매매특별법’을 불러왔고, 법령의 강력한 시행에 힘입어 집창촌은 논란만 남긴 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성매매특별법 제정으로 집창촌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자는 마지막 단락에서 ‘집창촌의 현재와 미래(2005~)’라는 제목으로 ‘오픈 엔디드(Open-ended)’방식을 취한다. 성매매나 집창촌 문제는 늘 현재진행형이며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성매매특별법의 강력한 시행이 겉으로는 집창촌 해체라는 성과를 보이는 듯 했으나 실상 성매매가 음지로 숨어들어가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저자의 말은 안마시술소, 룸살롱 등, 편법형 성매매 집결지의 수적 증가가 증명해준다. 사실 성매매특별법에 의한 집창촌 해체 또한 공간 재배치를 위한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존폐여부를 떠나 성매매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성매매 업소는 물론 집창촌 역시 존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성매매 완전근절’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는 오히려 성매매를 어느 정도 묵인하겠다는 국가의 속내가 아니냐는 저자의 따끔한 한마디는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성매매 선악 논란이라는 소모적 싸움에 앞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성매매 근절을 추구한다면 성매매 찬반 토론을 벌이기 전에 우선 여성들의 성매매 업소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낮은 여성 사무원 월급과 짧은 근속년수, 그나마도 없는 일자리 등, 갈수록 심각해지는 여성의 빈곤화는 성매매 유입 여성의 증가를 불러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고용에 대한 정부의 빈약한 지원은 결과적으로 성매매 촉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락문화의 번성과 성 판매, 성 구매자의 도덕성을 탓하기 전에 건전한 노동의 공급을 늘려야 한다.

 2007년 9월 23일은 성매매특별법 제정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업 중이던 집창촌은 이제 찬바람이 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성매매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효과 여부와 그 긍정, 부정적 영향들을 점검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성매매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와 함께 집창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비가시화된 집창촌을 가시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집창촌이 우리 삶의 한 터전이자 문화의 소비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역사를 알아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의무일 것이다.

 전국의 웬만한 도시 치고 집창 골목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집창촌은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집창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행동이나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성매매 현장인 집창촌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지 생생하게 보고하며 우리가 모른 척했던 음지의 역사를 되짚는다. 학부의 사회학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만치의 면밀한 자료와 고증이 돋보인다.

 저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집창촌이나 성매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그들이 선은 아닐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어떻게 실타래를 풀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집창촌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1. ☞지은이 홍성철은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스무살이 되던 해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저널리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Journalism is the best job in the world)”이라는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말에 따라 스물일곱이 되던 해 대학졸업과 동시에 문화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0년동안 사회부와 산업부, 국제부, 경제부 등을 거치면서 ‘2005년 씨티그룹 대한민국 언론인상’과 ‘2006년 삼성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는 기자 초년병 시절 경찰서 출입기자로 서울 신길동 텍사스와 청량리 588, 성남 중동 등의 사창가 르포를 하면서 “왜 사창가가 이곳에 생겼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주변 상인들은 물론 경찰서, 구청 등에도 물어봤으나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던 그는 지난 2003년 경찰청에 출입하여 성매매 관련 자료를 모으게 되며 이러한 궁금증을 차츰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2004년 9월 난산 끝에 발효된 ‘성매매 특별법’과 그에 대한 성매매 종사자들의 거센 저항 등을 지켜보면서 그동안의 고민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저자는 기존 자료의 단순 정리 차원을 뛰어넘어 집창촌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2006년 여름 3개월 동안 전국의 집창촌을 탐방,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미아리 텍사스, 용산역전, 청량리 588, 영등포역전)과 경기(평택 쌈리, 동두천 칠리, 파주 용주골), 인천(옐로우하우스와 학익동), 강원(춘천 난초촌과 장미촌, 원주 희매촌, 태백 대밭촌, 동해 발한가, 속초 중앙시장), 대전(중동, 정동, 유천동 텍사스), 전북(군산 개복동과 대명동, 전주 선미촌과 선화촌), 광주(대인동), 전남(목포 사쿠라마치와 히빠리시장), 부산(완월동, 범전동 300번지, 해운대 609), 경남(마산 신포동), 대구(자갈마당), 경북(포항 중앙대학) 등 30여 곳의 집창촌에서 만난 지역 주민들과 포주, 성판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적으려 노력했다. 2006년 여름, 10년간의 일간지 기자 생활을 접고 현재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는 저자는 이를 저널리즘의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저널리즘의 모색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새 저널리즘 모색의 연장선에서 집필되었다. 저자는 앞으로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쳐온 우리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단면을 기록할 생각이라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