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며 생각하며

아! 이중섭

by 언덕에서 2014. 6. 12.

 

 

 

아! 이중섭

 

 

 

 

 

 

 

 

 

 

 

 

 

지난 연휴 때는 독문학자인 친구와 둘이서 부산시 동구에 조성된 이중섭 거리를 구경했다. 해당 지자체는 금년 5월에 구 교통부로터리의 부산은행 범천동 지점에서 구 보림극장 뒤 마을광장까지의 400m 구간의 길거리를 화가 이중섭(1916 ~ 1956)의 거리로 조성했다. 이 동네는 곽경택 감독이 만든 영화 <친구>의 배경이 된 동네로도 유명한데 과거 판자촌이 즐비해 부산의 대표적인 슬럼가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개인적으로는 ‘옛.금.동’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친한 후배가 살았던 동네라 더욱 친밀감이 드는 동네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시절 한 때 범일동 1497번지에 살았다. 이곳에는 이중섭 갤러리, 마사코 전망대, 희망길 100계단 등이 들어섰는데 ‘이중섭의 범일동 풍경’ 거리가 조성된 거다. 이중섭의 부산 생활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중섭에 이야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놓아 과거 빈한하기 짝이 없던 판자촌 동네가 새롭게 보였다.

 

 

 

 

 

 

 

 

 

 

 

 

<저질 체력인 친구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처음 사용하는 DSLR 카메라는 사용법이 어렵고 또 불편하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최석태가 쓴 <이중섭 평전>에 의하면 이중섭이 부산에 머문 것은 1950년 12월부터 1951년 2월경으로 3개월가량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 동구청의 자료는 1951년 4월 초에 가족과 함께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갔으며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옮겨와 범일동에 있는 판잣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 3년 범일동에서 거주한 걸로 보인다. 이 무렵 이곳의 풍경을 그린 것이 <범일동 풍경>이다.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92·한국명 이남덕)와 아들 둘을 데리고 당시 피란민촌인 범일동에 머물렀다. 이중섭은 범일동에서 가까운 3부두 등에서 부두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고 가족들은 피란민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온갖 고생을 했다. 이 때 그린 작품이 그 유명한 ‘범일동 풍경’이다. 당시 끼니를 굶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한 마사코는 1952년 아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중섭은 부둣가에서 노동일을 전전하며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이중섭 작. 범일동 풍경 1951>

 

 

 

 

 

<이중섭 작. 판잣집 화실 1953 : 집 입구 부터 방 구석까지 술병들이 눈에 띈다>

 

 

 

 

 

 

 

 

 

 

 

 

 

 

 

<신기하게도 '희망길 100계단'에는 1950년대의 판잣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중섭도 이런 집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최석태의 <이중섭 평전>에 의하면, 이중섭은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별로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고 썼다. 이때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로, 값싼 임금에 가혹한 일거리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함께 일한 어린 소년에게 자신이 받은 대가를 모두 줘버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날은 일을 마치고 나오다가, 널빤지를 가져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어린 껌팔이 소년이 헌병들에게 곤봉으로 심하게 맞는 것을 보고 이를 제지하려다 몰려든 헌병들에게 곤봉으로 심하게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기도 했다. 겨우 치료를 받긴 했으나 그 후유증은 꽤 오래 가서, 그 후 이중섭은 부두 일을 그만두었다.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 p169>)

 

 

 

 

 

 

 

 

 피난 시절 내내 이중섭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고난에 직면하였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도 곤란을 몰랐으며 북한에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던 그였으므로 부산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략) 당시 부산은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를 수용하는데 한계에 봉착해 있었는데, 피난민 분산의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제주도였다. 그리하여 이중섭의 가족도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 p170>)

 

 

 

 

 

<내가 이십대일 때 이 동네는 온통 판자촌 천지였다. 쌍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멀리 보이는  63층 규모 부산국제금융센터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부산시 동구는 담벼락을 따라 ‘1951년 범일동 피란민에서 자유인으로’, ‘1952년 부두의 이별, 나도 곧 따라가리다’ 등 이중섭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거리미술관을 꾸며 놓았다. 이중섭의 생전 모습과 함께 시인 김춘수가 그를 그리워하며 쓴 시도 붙어 있다. 일본인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도 눈길을 끈다. 마사코 여사는 범일동 시절을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담벼락 곳곳에 이중섭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마을광장과 연결되는 희망길 100계단에 포토 존을 꾸미고 있다. 경사가 높고 긴 계단을 쉬엄쉬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사진은 '마사코 전망대'인데, 내 친구가 들어가려는 우측의 건물은 판자촌 화실을 재현해 놓았다. 너무 좁아서 촬영할 수 없었음을 알린다>

 

 

 

 

 

 

 

 

 

 

 안내 표지를 따라 가다보면 이어 사방이 확 트인 곳에 마사코 전망대가 보인다. 연면적 33.24㎡ 규모로 지상 2층 건물이다. 1층은 주민 사랑방과 이중섭 갤러리, 2층은 전망대와 이중섭의 편지글 등으로 구성된다. 이곳에는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던 판잣집 화실도 설치 미술로 재탄생되어 한국전쟁의 흔적과 고독하고 가난한 천재 화가의 흔적을 느끼게 만든다.

 

 

 

 

 

 

 


 

최석태 : 부산대 미술교육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이수. 1987년부터 1994년까지 계간미술, 월간미술에서 기자 생활. 1999년 이달의 문화 인물 선정 기념 이중섭전 실행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