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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한 겨울 밤의 꿈

by 언덕에서 2014. 4. 4.

 

 

한 겨울 밤의 꿈

 

 

그러니까 내가 취직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 두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삼선교 시장 맞은편 골목 안에다 전세방을 얻고, Y대학 철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후배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취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야말로 썰렁한 자취방이었으나 그나마 후배가 있을 때는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한데 대학가의 계절적인 열풍이 불어 닥치면 참 난감했다. 개강, 휴학, 조기 방학의 방정식으로 이어지는 데모의 뜨거운 바람이 거세게 불면, 조카가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대로 지낼 만했으나 겨울은, 스물 아홉 살의 노총각으로 죽치고 있는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들어 버렸다. 밥을 내가 해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스물 일곱을 지나면 노총각으로 불렀다)

 

 

 

 

 

 겨울철의 연탄불은 또 왜 그렇게 잘 꺼져 버리는지 그때마다 신경질이 나서 바짝바짝 마른 동태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하여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그냥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연탄불은 어김없이 꺼져 버리기 일쑤였고 그런 일이 계속되자 체념하여 연탄불을 살리거나 주인집에서 불을 붙여오고 어쩌고 수선을 떨고 싶지도 않았다.

 찬물로 고양이 낯짝 닦듯이 세수랍시고 하고는 그냥 뛰쳐나와 만원버스에 매달려 출근길을 열어 피곤한 하루를 시작하였는데, 회사 앞 작은 식당에서 계란 후라이나 두어 개 먹고 근무하려면, 영 속이 뒤틀렸다. 그럴 때는 제기랄, 아무 여자나 데려와 밥이나 짓게 하고 살면 안되나 싶었다. 'Out of sight,Out of mind.' 안 보면 멀어진다는 서양의 속담처럼 각자의 직장 때문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사귄 기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결혼을 약속한 후배k와도 연락이 뜸했을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퇴근 후에 친구와 만나지 않고, 술도 안 마실 수야 없지 않은가. 설령, 하숙으로 옮긴다 해도 내 월급으로 비싼 하숙비를 내고 보면, 몇 푼도 남지 않기 때문에 천상 전세방에서 뒹굴어야 했다.

 그날도 나는 퇴근하기가 바쁘게 종로의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순대 안주를 곁들여 소주를 마셨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성긴 눈발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을씨년스럽기만 한 전세방으로 일찍 귀가하는 청승을 떨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그냥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이다.

 

 

 

 

 

 나는 열 시경에 친구들과 헤어졌다. 얼큰해진 나는 웬지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어 다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내게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는 여자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상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여자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저런 여자와 사귀어 보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맞은 편 자리에로 곧장 한 사내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광경을 본 나는 금방 다방을 빠져 나왔다. 하늘에는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삼선교 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내게서 일 미터쯤 떨어진 인도에 밤, 오징어 등을 굽는 수레 한 대가 서 있었는데, 거기서 밤을 사먹고 있는 한 아가씨가 얼핏 보였다. 계속해서 하늘에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눈은 가로등 불빛과 조화되어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그 참 아름답고도 쓸쓸하네…….”

 나이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 아가씨는 나를 바라보며 대뜸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내게 다가서면서 말이다.

 “아니, 저보고 한 말이예요?”

 그냥 묵살해 버렸으면 되었을 텐데 정색하고 질문을 했다.

 그녀는 세상에 별놈 다 봤다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는 진퇴양난이었지만, 그러나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 쳤는데 그녀는 내가 자주 들리는 업체의 경리사원 미스 리(Miss 李)가 아닌가(대부분의 직장에서 1990년 이전까지 여직원 호칭은 김○○, 이○○씨 대신 미스 김, 미스 리... 등으로 불렀다). 배꽃으로 상징되는 여자대학의 통계학과를 나왔다는 미스 리는 나와 2년째 구면이었다. 과장과 함께 그 업체를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그 회사 부장이 내가 총각인가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과장이 그렇다고 하자 그 회사 부장은 내게 미스 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내가 허붓허붓 웃으며 대답을 피하자 부장은 “미스 리는 당신이 좋다는데…….”라며 웃은 적이 있었다.

 “어머,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퇴근길이신가 봐요?”

 그 회사를 방문하면 그녀를 시발점으로 업무를 시작해야 했기에 그냥 지나치기에는 좀 그랬지만 늦은 시간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 예……. 버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저기 버스가 오는군요.”

 다행히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어머 어머, 매너 좀 봐. 그냥 가시는 거예요? 차라도 한 잔 해야 하는게 아닌가요?”

 그런데 그녀는 나를 따라 나서겠다는 폼이 아닌가. 순간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지만, 마신 술이 모자랐는지 아랫배에 힘을 주고 곧장 정류소 뒷골목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이윽고 소주와 안주를 시킨 나는, 어색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녀에게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눈 오는 날 밤거리에서 밤을 먹고 있는 우아한 여성의 모습이 그림처럼 인상적이었고 그게 미스 리인지는 몰랐다고 둘러대자 그녀는 대뜸 반박했다.

 “거짓말 말아요. 시원찮게 생겼으니 평소에도 내게 관심이 없었죠.”

 피식피식 웃으면서 이죽거리듯이 직설적으로 쫑알대는 그녀도 이미 다른 곳에서 한 잔이 된 상태였다.

 “천만에요. 이렇게 어설프기 그지없는 겨울밤이면 나 같은 총각 월급쟁이는 너무 외로워 미스 리 같은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넋을 잃는답니다.”

 “하, 언변이 대단하시군요. 어쨌든 재미나는데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따라 말이 많아졌다.

 “영 믿어주지 않는군요. 제가 불한당처럼 보이십니까?”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길 나누고 있잖아요.”

 그런데 놀란 건 그녀의 주량이 나보다 훨씬 더 세다는 점이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 세 병을 시켰는데 한 병은 내가 마시고 두 병은 그녀가 물마시듯 꿀꺽꿀꺽 가볍게(?) 마셔버렸다.

 “저는 대학원에 다니는 후배와 전세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지금은 방학 중이라 혼자 있습니다.”

 “그럼 식사는요?”

 “제가 해먹고 있지요.”

 “식사 때문에 문제시겠군요. 그래 거리에서 방황하셨군요.”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전 자취방까지도 따라가서 구경하고 싶은데요. 호호…….”

 자못 대담한 제안을 눈 한번 까닥 않고 내뱉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가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지 않나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금테 안경 너머로 계속 웃고 있었다.

 “댁이 어디신데요?”

 “수유리예요.”

 “삼선교니까 그럼 됐군요.”

 그런 말까지 하고나니까 나 자신이 어이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눈오는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삼선교 쪽으로 가는 텅 빈 버스에 올랐다. 

 

 전세방의 연탄불은 어김없이 꺼져 있었고, 방바닥은 요이불이 깔려 있는데도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나는 석유 스토브를 켜놓고 들어오면서 사온 세 병의 맥주를 따놓고 그녀와 앉았다. 맥주를 다 비우고 났을 때도 그녀는 냉큼 일어서지 않고 오징어만 씹고 있잖는가. 나는 평소 엉큼하게도 이런 순간을 내심 상상했음에도 막상 당하니까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일이 그렇게까지 비약했을 때, 대부분의 남자가 여자에게 할 행동이란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와 나는 영하 십오 도가 되는 그 추운 밤을, 얼음장보다 차가운 밤을 달리 보낼 수도 있겠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손님, 종점에 왔으니 빨리 내리세요!”

 버스 안내양의 신경질적인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혼자서 버스를 내려야만 했다.

 종로에서 1차를 친구들과 마시고 이후 우연히 만난 미스 리와 포장마차에서 2차로 마신 술로 인해 버스에서 그만 잠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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