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랑 이야기
사랑(또는 性)을 자동차 운전에 비유한 사라 러딕의 말은 옳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법규들의 정당함이나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운전석에 오르고 보면 우리는 어린애 같은 흥분과 쾌감에 그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부도덕한 관계나 무모한 사랑의 위험을 잘 알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가해질 위해를 피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한 번 사랑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이내 비정한 쾌감과 잔인한 위기에 휘몰려 그 모든 것을 잊게 되고 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절 꾸짖고 야단들을 해도 저는 무섭지 않아요.
저어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
하지만, 오실 땐 부디 조심하세요.
그 싸리문을 열 때까진 오시면 안 돼요.
그때까지 가만히 울타리 옆에 숨었다가 시침일 딱 떼시고 들어오세요.
예배당에서나 저자에서 만나더라도 못 보신 척 하시고 지나가세요.
하지만, 그 검은 당신의 눈으로 살짝 한번 눈짓만 하세요.
안 보신 척 하시면서 보고 가세요.
안 보신 척 하시면서 보고 가세요.
언제든 저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세요.
이따금 조금씩은 칭찬을 하셔도 괜찮으시지만…….
하지만, 딴 여자 분하곤 절대로 놀아서는 안 돼요.
당신을 빼앗기면 전 못 살아요, 당신을 빼앗기면 전 못 살아요.
위의 작품은 영국의 시인 로버트 번즈1의 시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로 가겠어요>이다. 가만히 읊어내려 가노라면 막 첫사랑에 눈이 뜬 어느 소녀의 순결한 속삭임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소녀는 휘파람 소리만 들려와도 벌써 임의 목소리임을 알아본다. 그러면 하던 일을 모두 내동댕이치고 그이에게로 달려간다. 주체가 소녀라고 해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다. 소년이라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래도, 설사 부모님이 나무라실지라도 정녕 당신만을 사랑하는 나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을 위해서라면 불이고 물이고 가리지 않는 것이 사랑에 눈이 뜬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예배당이나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길 만나더라도 그저 살짝 눈웃음만 해 보이고 아는 척은 하지 말라고. 그래도 자기만은 당신의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굴 만나서 자기 얘기가 나오면 몇 마디쯤은 칭찬을 해 주어도 상관은 없지만, 남들은 자기를 아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무시한다 해도 당신만이 알아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독백한다. 자신의 사랑은 오로지 당신만의 것이고,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자신은 무한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온갖 것이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들에 지금도 회의(懷疑)적이다.
♣
이야기의 순서대로 내가 군대에서 있었던 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계속해야겠다.
군생활을 2년 이상 같은 내무반에서 나와 함께 한 후임병 J는 나보다 두 달 늦게 입대했다. 속초에서 전문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다는 그는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이었다. 그가 자대에 전입오던 날은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날 내가 J에게 더블백을 풀어주며 부모님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으니 예상과는 달리 딸내미가 애타게 보고 싶다고 했다. 딸내미? 결혼하여 낳은 딸이 있냐고 물으니 여자 친구 즉 애인이라고 했다. 그와 애인과의 사연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다.
J의 아버지에게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 부부가 10년 전 교통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J의 아버지는 졸지에 고아가 된 친구의 어린 딸을 양녀로 입적시켜 J와 함께 키웠다. 둘은 한 살 나이 차이로 호적상의 오누이로 함께 자랐지만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 둘은 서로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J는, 호적상 동생이자 타인인, 아버지 친구의 딸과 서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고교를 졸업하는 시기는 자연스레 둘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지방에서 수재로 불리던 그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서울의 K대에 입학했고 그녀는 1년 뒤 속초의 모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1년 동안의 시간은 서로에게 고통과 번민의 나날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은 서울에서의 학업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그는 부모 몰래 K대를 자퇴하고 그녀가 다니고 있는 속초의 전문대로 편입했다. J의 부모는 그런 그를 만류하고 타이르고 야단쳤으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들의 행동에 실망한 그의 부모님은 그의 감정적인 행동을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 J에게 군입대를 강권했다. J는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부모님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맞섰지만 입영통지서 앞에서 무력했다.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를 했다고 하지만 J의 뇌리 속에는 항상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군복무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J가 내게 보여준 그녀의 편지에는 흔히들 사용하는 ‘J 오빠’ 또는 ‘J야’, ‘J씨’ 등의 호칭이 아닌 ‘J분’이라는 깍듯한 존칭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그가 육군훈련소에서 훈련 중일 때 도착한 편지였다. 그는 내게 다음의 편지를 보여주며 좌절하고 또 좌절해 했다.
'간절하고 진실히 내가 사랑하는 J분……. 저는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J분 댁도 떠납니다. J분도 이제는 입대를 했으니 부디 저를 잊고 건강히 제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아아, 아프게 내가 사랑하는 J분, 이제부터는 저로인해 생긴 모든 고통을 버리시고 행복하시기만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
이게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러브스토리 마지막 부분이다. J는 그녀가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쳤기에 힘들게 공부하여 들어간 대학을 자퇴하고 부모와의 인연을 끊는 등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노라고 한탄했다. 나는 J로부터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뭘 알아야 면장(面墻)을 하는 건데 그 부분 나 자신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은 백지에 가까웠던 탓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하는 그날, 대부분의 남자들이 군대의 모든 것을 그곳에 반납하듯이 나도 J라는 이름의 그 후임과 그에 대한 모든 기억을 국방부에 반납하기로 했다. 사랑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사랑에 대한 기억' 하나를 안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그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한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순정이 부러웠던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그만한 순정마저 없었으므로. 무슨 이유였는지 제대 후 J와 나는 서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그에게 매사 냉정하게 대했던 나에게 그가 서운했을 것이라는 후회도 생긴다. 요즘처럼 휴대폰이나 SNS가 있던 시대도 아니었기도 하지만, 어쩌면 당시 매사 원리원칙과 인습에 충실한 내가 그에게는 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 로버트 번즈(1759 ~ 1796)스코틀랜드 에리셔 출생. 각지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는 틈틈이 옛 시와 가요를 익혔으며, 스코틀랜드의 방언을 써서 자신의 사랑과 마을의 생활을 솔직하게 노래하였다. 최초의 시집 《주로 스코틀랜드 방언에 의한 시집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1786)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한때는 에든버러에서 문단생활도 하였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면서 옛 민요를 개작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에 공감하여 민족의 자유독립을 노래하여 당국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18세기 잉글랜드의 고전취미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샌터의 탬 Tam o’Shanter》(1791)을 비롯한 이야기시(詩)의 명작과, 《새앙쥐에게 To a Mouse》(1785)와 《두 마리의 개》처럼 동물을 통하여 인도주의적 사상을 표현한 작품도 있으나, 역시 그의 진면목은 《둔 강둑 The Banks of Doon》(1791)이나 《빨갛고 빨간 장미 A Red, Red Rose》(1796)와 같이 자연과 여자를 노래한 서정시,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1788) 《호밀밭에서》와 같은 가요에 있다. 지금도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민시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번스 [Robert Burns] (두산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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