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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완서 연작소설『엄마의 말뚝』

by 언덕에서 2014. 1. 9.

 

 

 

박완서 연작소설『엄마의 말뚝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3편으로 된 연작소설로 1979년 발표되었다. 2부는 1982년 발표되었는데, 198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은 중년 여인이며 화자인 ‘나’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의‘엄마에게 박힌 말뚝’에 관한 이야기이다.

 6ㆍ25전쟁이 우리 민족 개개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아있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북쪽에 고향을 둔 한 가족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삶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문제인 분단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6ㆍ25로 인해 이산된 한 가족이 겪은 전쟁 당시의 상황과 현대의 서울을 병치시켜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박완서의 작가 의식이 큰 줄기를 차지하는 분단의 극복 의지가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서 분출되고 있다. 분단의 비극이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로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을 작가는 한 어머니의 정신 착란의 외피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몸소 분단의 희생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절실하게 와 닿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과 민족의 관계가 오직 가족사 속에서 깊이 파악됨으로써 추상적이기 쉬운데, 이 작품에서는 분단 문제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남다른 경지임을 보여 준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겨울날, 나는 친구의 농장에 초대되어 친구가 내놓은 앵두주를 마시며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친구와 그의 남편이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런데 집에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여태껏 경험한 섬뜩함 중에서 최악의 것을 느끼면서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 동안 내가 집을 벗어나 집을 잊고 있을 때마다 집안에서는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집을 나왔을 때 느끼는 섬뜩한 예감은 늘 적중하였는데, 오늘의 섬뜩함은 그 중 가장 최악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족들은 외할머니, 즉 나의 엄마가 눈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내 식구가 아니라 친정어머니라는 데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책망하면서도 술기운에 짧은 단잠을 자고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가 보니 뜻밖에도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왼쪽 다리는 엉덩이 밑에서 밖으로 돌아가서 심각한 지경이었으며, 의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마다하던 어머니도 과거에 손목이 부러졌을 때 오빠가 구해다 준 산골을 생각하면서 수술을 받기로 마음을 고쳤다. 86세의 노쇠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의외로 쉽게 수술을 치러 냈고, 식구들과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아니, 이상하리만치 말이 많고 근력이 지칠 줄 몰랐다. 그리하여 수술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식구들을 모두 보낸 후 나 혼자만 남아 어머니를 간병했다.

 그런데 그날 밤, 어머니는 정신이 나간 채 수술한 다리를 부여잡고 아들을 살려 달라며 길길이 날뛴다. 6ㆍ25전쟁 때 오빠는 인민군의 총에 다리를 맞고 죽었던 것이다.

 오빠는 해방 후 한때 좌익에 가담했었지만, 전향했다. 그런데 6ㆍ25전쟁이 나고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자 이웃들이 고발하여 어쩔 수 없이 오빠는 인민군에 자원입대하게 되었다. 서울이 국방군의 치하가 되었다가 다시 인민군의 차하가 되던 어느 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채로 오빠가 탈영하여 돌아왔다. 오빠가 시민증이 없어서 피난을 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우리는 서울로 올라와 처음 터를 잡고 살던 현저동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인민군에게 발견되고, 인민군들은 전쟁의 공포로 여전히 떨고 있는 오빠를 인민군에서 도주했다는 등 국방군에서 낙오했다는 등 집요하게 볶아댔다. 마침내 그들은 북으로 패주하면서 오빠의 다리를 집중적으로 쏴 댔다. 오빠의 총상은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죽고 말았다. 

 그날의 원한은 엄마의 가슴에 말뚝이 되어 박혔다. 엄마는 탈진하여 백지장 같은 모습으로 며칠을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자신이 죽거들랑 묘지에 묻지 말고 오빠에게 했던 것처럼 해 달라고 한다. 오빠는 화장을 해서 고향 개풍이 보이는 강화도 바닷가에서 날려 보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줌의 먼지와 바람으로 분단이라는 괴물과 싸우려고 한다. 어머니를 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라는 괴물,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그 괴물을 없애는 길은 정녕 그 짓밖에 없는가? 나는 그 짓을 또 한번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아직도 투병 중이시다.

 

『 엄마의 말뚝』은 박완서가 쓴 80여 편의 단편소설 중에서 유일한 연작소설이자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엄마의 말뚝 1』은 송도에서 대처로, 대처에서 서울 문밖으로, 문밖에서 문안으로 이동하던 박완서의 유년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기인한다. 「엄마의 말뚝 2」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에 고정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이제는 노쇠한 어머니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를 담았고 「엄마의 말뚝 3」은 생명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지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쓴 글이다. 

  이 세 소설은 시간차를 두고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던 박완서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머니 홍기숙 여사의 삶의 궤적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한국 여성의 삶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 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엄마의 말뚝 2>는 이 연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쟁과 오빠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해방 뒤 한때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오빠는 삼팔선을 넘어 물밀듯이 남진해온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이웃의 고발로 끌려가서는 의용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9ㆍ28 수복에 이어 다시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1·4후퇴가 시작될 즈음 육신과 정신이 다같이 망가진 오빠가 ‘흉몽처럼’ 돌아온다. 시민증이 없는 오빠 때문에 남들의 피난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민군의 재입성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도 없던 일가는 예전에 살던 현저동 산꼭대기의 한 집을 피난처로 정해 틀어박혔으나, 오빠는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돼 죽음을 당한다. 소설은 40년 가까이 애써 덮어두고 있던 그 끔찍한 기억이 수술을 위한 마취의 부작용으로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연작의 마지막 편은 이 마취 사건 뒤로도 7년을 더 살다 간 어머니가 아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돼 강물에 뿌려지길 바랐던 당신의 소망과는 달리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에 묻히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명민하고 헌칠하여 어릴 적 영웅이었던 오빠를 앗아간 전쟁의 악의(惡意)라는 모티브는 박완서 소설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됐다. 이미 등단작인 장편 <나목>에서부터 변형된 형태로 오빠의 죽음을 다루었던 작가는 그 뒤 <부처님 근처>와 <카메라와 워커>를 비롯한 단편들,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장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 줄기차게 동일한 모티브를 반복, 변주하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 청년의 죽음이 한 가족의 아픔과 고난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 전체의 비극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6ㆍ25로 인해 이산된 한 가족이 겪은 전쟁 당시의 상황과 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분단의 비극이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로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을 어머니의 정신 착란에서 끄집어내고 있다.

 연작 중 '엄마의 말뚝 2' 에서 '말뚝'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나'의 말뚝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이고 '나'는 그 말뚝에 매여 자신의 인생을 찾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어머니의 말뚝은 죽은 오빠에 대한 애통함이다. 즉 '나' 의 말뚝보다 더 참혹한 것으로, 어머니의 말뚝은 바로 오빠에 대한 애정, 다시 말해 원한 맺힌 분단의 상처인 셈이다.

 이렇게 6ㆍ25의 비극과 함께, 오빠라는 존재를 사이에 둔 모녀간의 오랜 갈등을 통해 그 상처가 삶 속에서 깊게, 지속적으로 덧나는 것을 보여 준다.그리고 그것의 근원적 치유는 결국 죽음이라는 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진심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의 심연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