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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경리 단편소설『불신시대(不信時代)』

by 언덕에서 2013. 12. 19.

 

박경리 단편소설 『불신시대(不信時代)』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단편소설로 1975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제3회 현대문학상 신인상 수상작으로 1963년도 그의 단편집 <불신시대>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사회 구성원들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회악과 위선의 탈을 쓴 종교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리얼리즘 성격을 보이고 있는 소설이다. 9ㆍ28 수복 전야에 유엔군인 남편을 잃은 진영이라는 여성의 힘겨운 삶이 중심 내용이다.

 이 작품은 전쟁미망인의 문제들을 다룬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일련의 소설들은 작가의 직접적인 생활 체험과 그 제재가 유사하여 사소설(私小說)이라 불린 일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을 끈 것은, 부정과 위선과 계산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암흑한 면을 파헤치고 고발하는 작가 정신의 투철함에 있다.

 의사의 무관심 때문에 외아들 문수가 죽고, 중들은 돈을 좇아 종교를 팔고, 병원에서는 치료약의 함량을 속이며, 곳곳에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현실. 진영은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이 시대를 불신한다. 그러나 아들의 위패를 불태우는 행위로써 현실의 폭력성에 대결코자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9ㆍ28 수복 전야에 진영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도로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었다. 소년 병은 물 한 모금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불렀다. 그것을 본 행인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

 남편은 마치 자신의 죽음의 예고처럼 그런 이야기를 한 수 시간 후에 폭사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진영은 1ㆍ4 후퇴 때 세 살 먹이 아이를 업고 친정어머니와 같이 제일 마지막에 서울에서 떠났다. 그러나 안양에 이르기도 전에 중공군이 그들을 앞질렀고, 유우엔군의 폭격 밑에 놓였다. 수없는 피난민이 얼음판에 거꾸러졌다. 피난 짐을 끌던 소는 굴레를 찬 채 둑 밑으로 굴렀다. 피가 철철 흐르는 시체 옆에 아이가 울고 있었다. 진영은 눈을 가리고 달아났던 것이다. 악몽과 같은 전쟁은 끝났다.

 진영은 아들 문수의 손을 잡고 황폐한 서울로 돌아왔다. 집터는 쑥대밭이 되어 축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진영은 잡풀 속에 박힌 기왓장 밑에서 물씬 물씬 무너지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프랑스 문학의 전망>이라는 일본 책이었다. 이 책이 책장에 꽂혔을 때, 순간 진영의 머릿속에 그러한 회상이 환각처럼 지났다. 진영은 무심한 아이의 눈동자를 멍하니 언제 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문수가 자라서 아홉 살이 된 초여름 진영은 내장이 터져서 파리가 엉겨 붙은 소년병을 꿈에 보았다. 마치 죽음의 예고처럼 다음날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일찍부터 홀로 되어 외동딸인 진영에게 붙어서 살아온 어머니는 내가 죽을 것을, 하며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었으나 진영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가 박경리( 朴景利. 1926&sim;2008 )

 

 이 작품은 9ㆍ28 수복 전야에 유엔군인 남편을 잃은 진영이라는 여성의 힘겨운 삶이 중심 내용이다. 의사의 무관심 때문에 외아들 문수가 죽고, 중들은 돈을 좇아 종교를 팔고, 병원에서는 치료약의 함량을 속이며, 곳곳에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서 진영은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이 시대를 불신한다. 그러나 아들의 위패를 불태우는 행위로써 현실의 폭력성에 대결코자 한다.

 '불신시대'라는 제목이 밝혀 주듯이 주인공 진영을 둘러싼 사회 현실은 모두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한다. 특히, 그 지독한 배금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생존 자체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아들의 위패를 태우게 되는데, 아마 그녀는 아들의 영혼이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기를 바랐기에 그런 매몰찬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그녀에게 이 위패를 태우는 범상치 않은 행위는 쓰라린 과거를 의식 속에서 지우는,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적 면모로 세상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비록 실천적 행위를 통하여 시대 상황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해결책을 찾으려는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 내에서 내면적으로 대결 의지를 다진다는 점에서 한 여인의 한계와 상황 극복의 결의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 전개가 주인공 진영 개인의 체험과 의식으로만 제시된다는 점이다. 환경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피해 의식과 감상주의에 치우쳐 있어서 소설의 마지막 독백, '그렇지, 내게는 아직..' 대목은 개인적 자신의 자기 설득이요 다짐일 뿐 공감대의 형성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