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박완서 장편 소설 『그 남자네 집』

by 언덕에서 2013. 12. 5.

 

 

박완서 장편 소설 『그 남자네 집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장편소설로 2004년 [현대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작가의 유작이다. 첫사랑이라는 본성에 가까운 감정과 대비를 이루며 전후 피폐한 일상과 그 생활전선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실상이 가슴 찡하게 담겨있다.

 전후 1950년대 서울의 피폐한 풍경이 눈에 보이듯 그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 나이 든 주인공이 당시의 첫사랑 ‘그 남자’가 살았던 돈암동 안감내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해 후, 대학생 신분으로 미군부대로 일을 다니던 내가 어느 날 겨울 저녁 퇴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 빛나고 행복한 겨울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가만의 독특한 페이소스와 기지 넘치는 문장이 전체를 이루고 있어 읽는 재미는 물론 진한 감동을 선사하고, 중심 줄거리에서 벗어나는 등장인물들 각각도 개성이 두드러져 이 작품의 축을 받쳐준다. 출간 당시 저자는 이 작품을 힘들고 지난했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문학에 바치는 헌사’라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이 든 주인공이 당시의 첫사랑 ‘그 남자’가 살았던 돈암동 안감내를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인 그 남자네가 내가 사는 동네의 홍예문이 달린 기품 있는 기와집으로 이사 왔다. 그 남자와 만남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몇 해 후, 대학생 신분으로 미군부대로 일을 다니던 내가 어느 날 겨울 저녁 퇴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폐허의 서울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내 생애의 구슬’처럼 빛나는 행복한 겨울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한 푼도 못 버는 백수’였고 나는 ‘다섯 식구의 밥줄’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미군부대에서 만난 전민호는 ‘웬만한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은행원이었다. 나는 결국 민호와 결혼을 결정하고 그 남자와는 이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결혼은 환상이었고, 그 환상은 곧 깨졌다. 당장 생활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코 남편은 부자가 아니었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으로 어렵게 한 달을 꾸리다보면 가계부는 늘 적자였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사사건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나와 종교관까지 달라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박수무당과 의논하여 결정하였고, 심지어 아이가 들어서는 것까지 무당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결혼생활은 신혼의 재미가 뭔지도 모르는 채 급격히 권태로워졌다. 

 그 즈음 시장통에서 ‘그 남자’의 누나를 우연히 만나 그의 소식을 듣게 되고, 급기야 첫사랑과의 재회에 이르게 된다. 밀회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위기의 순간은 다가왔다. 어느 날 그는 하룻밤의 밀월여행을 제안했고, 나는 ‘짜릿한 기쁨’을 느끼며 그날을 기다린다. 그날은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된다. 그날 그는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이 세상에 팽개쳐진 기분에 빠진다.

 그 남자가 뇌수술을 했고, 눈이 멀게 됐다는 사실을 들은 나는 얼마 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그와 재회한다. 눈앞에 나타난 그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위로의 말보다 육친애적 분노를 느끼며 장님임을 인정하고 새롭게 살아가라고 욕설을 섞어 울부짖듯 충고하는 것으로 첫사랑을 지운다. 그리고 그 남자를 끝으로 다시 만난 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는 그때 중학교 여선생과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점점 더 굵은 눈물을 흘리는 그 남자를 나는 무너지듯 포옹하며 담담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 남자'는 이미 죽은 후다. 주인공 여자도 노년이다. 그러면서도 '그 남자'에 대한 추억은 매우 생생하다. 여자가 기억하는 그 남자는 불손하면서 우울하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하다. 한 마디로 패러독스한 인물이다. 첫사랑이 원래 그렇다,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네 집』은 고 박완서 선생이 50여 년을 꼭꼭 여며두었던 첫사랑을 조심스레 펼쳐 보인 기록이다. 전쟁의 아픔, 자본주의 비판, 여성 운동의 허실을 집요하게 파헤치던 작가는, 마지막에는 결국 ‘사랑’을 썼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시절에도 사랑은 있었고, 어두울수록 더 찬란히 빛났다. 이 마지막 장편 소설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여러 젊은 등장인물들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 모습을 담아낸 데 있다. 박완서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아픔을 치유한 모습, 고통을 받아들여 내화시킨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본인의 상흔 역시 치유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첫사랑은 여전히 추억에만 남는다. 이 추억으로 여자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첫사랑의 집에 대한 절대적인 장소감이 생긴 것인지 모른다. 이 작품은 박완서 선생만의 독특한 페이소스와 기지 넘치는 문장이 전체를 이루고 있어 읽는 재미는 물론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중심 줄거리에서 벗어나는 등장인물들 각각도 개성이 두드러져 이 작품의 축을 받쳐준다. 첫사랑이라는 본성에 가까운 감정과 대비를 이루며 전후 피폐한 일상과 그 생활전선을 직접 몸으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실상이 가슴 찡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이 각박한 현실을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는 삶의 억척스러운 의욕이며, 삶의 원시적 동력이리라. 이 점이 흘러넘치고 있는 이 작품은 때문에 갓 뛰어오르는 등푸른 생선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