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강경애 중편소설『지하촌(地下村)』

by 언덕에서 2013. 11. 5.

 

강경애 중편소설 『지하촌(地下村)』

 

 

강경애(姜敬愛. 1907∼1943)의 사회성 짙은 중편소설로 1936년 3월 12일부터 4월 3일까지 [조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이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극빈 지대인 ‘지하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인공인 칠성이의 암담한 생활 주변 상황과 함께 묘사하면서 일제 식민지하의 극단적으로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사회의 밑바닥을 파헤쳐 강렬한 사회개혁의 의욕을 나타낸 것이다. 간도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과 같이 이 작품 역시 일제치하의 참상을 사실적인 묘사로 강렬하게 고발한 것으로서, 강경애 특유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193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한국 문단은 여러 가지 색채와 음성이 뒤석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문학적 주조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 지나사변(1937)을 도발하면서 우리의 문화 전반에 걸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래서 작가들은 다양한 색채의 소재들을 양산하여 이에 대응하였는데 강경애는 자신의 불우한 생활을 반영하듯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상류 사회보다는 서민의 생활을, 리얼한 수법으로 강렬하게 묘사하였다. 「지하촌」은 '문학은 인간의 현세적 삶을 외면하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 참여적인 작품으로서 사회의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 개혁의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1930년대 문학사는 제한된 현실에서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칠성은 네 살 때 홍역을 앓고 난 다음 경풍에 걸려 팔다리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어머니를 도우려고 동냥자루를 둘러메고 여러 곳으로 구걸행각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좋은 물건이 생기면 어릴 때의 병으로 눈먼 옆집의 큰년이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는 오늘도 동냥해온 과자를 큰년이에게 어떻게 전해줄까 하면서도 사탕을 달라고 보채는 남동생이나 여동생의 몰골에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들은 하나도 귀한 존재가 아니다.

 큰년이 어머니는 오늘 밭일하는 도중에 아이를 낳았으나 이내 죽자, 그것을 오히려 잘 된 일로 생각한다. 칠성이 자신도 어려서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절실하였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에 따르면 큰년이 집에는 그러한 북새통에도 큰년이 선을 보러 온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읍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아들을 얻기 위하여 큰년이를 데려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칠성은 기어코 큰년이를 만나 무슨 말이든 들어보려 마음먹는다. 그러나 큰년이의 태도는 석연하지 않다.

 이틀 뒤, 칠성은 송화읍까지 나가 큰년이에게 줄 옷감을 사서 밤을 새며 비를 무릅쓰고 귀가를 서둘렀다. 칠성이 집에 당도하였을 때 집과 마을은 그 동안에 내린 비 때문에 비참한 모습으로 변하여 있었다.

 동생들은 모두 눈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이 집 저 집의 논밭은 유실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소식은 큰년이가 어제 읍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로 시집을 갔다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칠성은 밖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노려볼 뿐이다.

 

조선일보 연재소설 '지하촌'의 삽화

 

 강경애는 이 소설에서 구제받을 길 없는 불구자,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어린이를 등장시켜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외 계층에 대한 어떤 대안이나 어려움을 극복해갈 수 있는 혁명성이 제시되지 않아 강경애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모임에서도 다소 거리를 둔 형태의 고발 문학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최서해와 함께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모습을 잘 대변해 준 작가이다. 강경애의 소설에는 소설적 관습을 깨뜨리는 궁핍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적 묘사를 통해 대상을 생동감 있고 실감나게 표현한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극도의 가난은 소름이 끼칠 만큼 처참하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끔찍한 가난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우리 민족의 가난은 극도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특히 가난했다. 게다가 남편을 잃고 어머니 혼자 세 아이를 데리고 사는 칠성네 같은 집이야 오죽했으랴. 땅뙈기 하나 변변한 것도 없고, 한몫을 할 아이들은 불구자이니 더더욱 생활의 고통이 극심했을 것이다.

 이렇듯 처절한 상황과 큰년이를 향한 칠성이의 마음은 분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현재 생활이 절망이라면, 큰년이를 향한 사랑은 희망이다. 칠성이 집 사람들의 삶이 음울하고 칙칙한 빛깔이라면 큰년이를 향한 칠성이의 마음은 분홍빛이다. 그러나 작품 끝 부분에 가서 그 희망마저 무너져버릴 때, 글을 읽는 이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거지인 주인공 칠성이는 동냥을 하여 연모하는 이웃집 눈먼 처녀인 큰년이에게 인조견 옷감을 떠다 주지만, 그녀는 이미 부잣집 첩살이로 떠나게 된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도 없고, 또한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첩살이를 해야 하는 하층민의 극한 상황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빈민촌을 배경으로 궁핍한 서민의 참담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 현실참여적인 작품으로,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먼 '지하촌'이라는 은유적 공간에서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구 청년의 순정과 절망을 객관적 수법으로 그려냄으로써, 궁핍한 식민지시대의 본질적인 모순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사회의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극한적 빈궁상을 폭로한 객관적이고 섬세한 묘사기법은 강경애 소설의 문학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추악한 대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와 작가의 사회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1930년대라는 문학사상 제한된 현실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을 실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강경애 :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많은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우쳤다. 장연여자청년학교와 장연보통학교를 거치면서 두드러진 작문 실력을 발휘했다. 1921년 평양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923년 10월에 학생 동맹휴학 사건 관련자로 퇴학 조치 당했다. 이 무렵, 장연 태생의 동경 유학생 양주동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서울 동덕여고에 편입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9월 그와 헤어지고 난 뒤 장연으로 돌아왔다.

1924년부터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조선일보 부인 문예란에 단편소설을 투고하였으며, 이해에 결혼한 뒤 6월경에 간도로 이주하였다. 1934년에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 문제』를 연재한 뒤 꾸준히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다가,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44년 4월에 지병의 악화로 결국 사망했다. 1999년 8월, 중국 용정에 ‘녀성 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지나사변 : 중일 전쟁(中日戰爭)이라고 부른다. 1935년 이래 일본이 화북분리공작(華北分離工作)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이 일어나자 관동군(關東軍)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육군 내의 전쟁 확대파는 소련의 참전을 경계하는 비확대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8월 13일 제2차 상해(上海)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전쟁을 신속히 끝맺으려 했으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룬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그해 12월에 이르러서야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1938년 5월에 서주(徐州), 10월에 광동(廣東)ㆍ무한(武漢)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력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 전선은 고정되고 일본군은 점(點:도시)과 선(線:철도)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도 광동ㆍ무한이 함락되자 사기가 떨어져 왕조명(汪兆銘)이 중경(重慶)을 탈출하여 난징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1940년 9월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 3국동맹이 체결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전쟁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