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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프랑스 사상가 루소 자서전『고백록』

by 언덕에서 2017. 5. 8.

 

 

  

프랑스 사상가 루소 자서전『고백록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유작 자서전으로 루소 자신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적은 내용이다. 2부 12권으로 되어 있는데, 1765년∼1770년 사이에 쓰였다. 제1부(6권:1781), 제2부(6권: 1788) 모두 루소가 죽은 후인 1781년∼1788년에 주네브에서 출판되었다.

 

 

 1762년 6월 프랑스 파리.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루소의 책 <에밀>이 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압수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루소는 밤을 틈타 해외로 도망간다. 연이어 <사회 계약론>도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고, 같은 해 가을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의 각 도시에서 그의 책이 불태워졌다. 그에 대한 비방이 넘쳤음은 물론이다.

 그중 가장 심한 비방은 루소와 함께 ‘백과전서’를 편찬했던 옛 친구의 글로, “루소는 다섯 아이를 거리에다 버렸으며, 위병 초소에 출입하는 갈보들을 데리고 다녔고, 방탕한 몸은 쇠약해지고 매독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루소가 머물던 망명지인 프랑스 사람들을 자극했다. 마을 사람들은 루소의 집에 몰려와 돌을 던졌고 아침이면 깨진 유리창 아래로 돌이 수북이 쌓였다. 루소가 머물던 지역 의회는 결국 그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때 루소의 나이는 쉰셋이었다.

 신변의 위협, 연이은 추방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쏟아내는 알 수 없는 비난들. 루소는 이 ‘정당하지 않은’ 비난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감정은 소용돌이쳤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감정이 삶을 집어삼킬 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방이 막힌 상황에서 출구를 찾듯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서점에서 정해준 자서전의 착상으로부터 중상ㆍ비난ㆍ박해에 대한 자기변명의 동기로 변하여, 출생으로부터 1765년 생피에르 섬 탈주까지의 반생을 회고한다. 비록 자신이 사회의 구렁텅이에 더럽혀져 추악하지만, 본래 선량하고 관대한 자기의 적나라한 자태를 고백하여,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려 한 것이다.

 제1부에서는 출생에서부터 청년기(1712∼1741년)까지의 이야기를 적었으며, 여기에는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는 루소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청춘의 싱싱함이 넘쳐 있으며 특히 분방한 청춘의 방랑생활을 밝게 묘사하였다. 1765년의 생피에르 섬 탈출까지의 이야기가 적힌 제2부에는 박해에 대한 편집 관념 때문에 그 흐름은 현저하게 어두워 때로는 병적이고 음침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밝히려는 자기변호의 색채가 강하다.

 내용은 그의 적나라한 자기 고백과 열렬한 자아의 해방 의식, 비상한 상상력 그리고 깊은 감성에 의한 색채가 풍부하다. 신선한 자연 묘사의 서정미는 이 영혼의 기록을 일류의 문학작품으로서, 낭만파의 작품 및 근대소설의 고백적 성격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 클로디우 자캉이 그린 ´뤽상부르 원수 부인´. 체포명령이 떨어져 도망가야 할 처지인 루소(왼쪽 두 번째)를 걱정하는 뤽상부르 원수 부인을 그리고 있다.

 

 루소는 개신교 집안으로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1728년 어느 날 저녁, 마을의 문들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그의 방랑 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젊은 여인 바랑스 부인 집에서 몇 년간을 보낸다. 그녀는 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킨다(그러나 이후에 그는 다시 개신교로 바꾼다). 1750년 그는 문명이 인간을 부패하게 했다는 생각을 피력하는 한편의 논술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로 인하여 철학자들 특히 과학의 진보를 믿었던 볼테르와 결별한다. 1758-1762년 사이에 몇몇 친구들로부터 거처를 제공받기도 했다.

 이때가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는 서한체 소설인 <라 누벨 엘로이즈>, 정치에 관한 글인 <사회계약록>, 교육론인 <에밀>을 쓴다. <에밀>은 그에게 많은 적을 만들어주었다. 책은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불태워졌다.

 그가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적의에 찬 반대에 부딪친다. 그를 중상하는 팸플릿이 발간되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회상록을 쓰기로 작정한다. 이것이 1765년까지의 삶에 대한 정직한 증언인 『고백록』이다 루소의 지극히 ‘주관적인’ 내면의 기억, 혹은 그의 ‘영혼의 ’역사’가  독자 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사소한 일화부터 자신의 치부가 될 만한 과오와 애정 행각, 거기에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치부까지, 온갖 사건을 오장육부를 내보이듯 고백하고 나서 그는 기세등등하게 외친다. “나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내가 말해 온 것과 반대되는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 내용에 무수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거짓말이며 조작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1778년 갑자기 닥쳐온 루소의 죽은 이후 몇 년이 지나서 출판되었다.

 문학에 대한 루소의 영향은 지대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주지주의에 대한 반발과 감수성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뒤에 올 낭만주의 문학을 예고하였다.

 

 

 

▲ 루이스 캉탱 드 라 투르가 그린 루소의 초상

 

 

 

 루소는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에 『고백록』을 썼다. 사실은 1762<에밀>이 금서(禁書)가 되어 자신이 추방된 뒤 일종의 자기변호의 필요에서도 자서전을 쓰려고 했다. 루소의 여러 저서를 출판하고 있던 암스테르담 서점주인 레이가 1754년경부터 저서마다 간단한 저자 자전(著者自傳)을 붙이도록 요청한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백록』1764년 말 스위스에서 펜을 들었다. 루소의 『고백록』은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는데, 1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가 쓰려고 한은 것은 아직 전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흉내 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을 벌거숭이로 해서 세상 사람들 눈앞에 내세우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인간이란 바로 나다. 나밖에 다른 아무도 없다. 나는 내 마음도 알고 인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 같은 인간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그런 인간은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란 남다른 훌륭한 인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 대자연이 나를 주조할 때 쓴 주조기를 부숴버린 일이 선이었는지 악이었는지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판단될 것이다.

 언젠가 최후의 심판의 나팔이 불려올 때 나는 이 책을 들고 심판자인 신 앞에 나가 큰소리로 말하련다. 나는 이렇게 했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있는 그대로를 말하련다. 무엇 하나라도 나쁜 것을 숨기거나 무엇 하나 선한 것을 과장하지도 않으련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루소는 누구와 누구와의 아들로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고 하는 출생신고부터 시작해서 있는 그대로를 쓰기 시작했다. 루소로서는 가장 충격적인 방랑시기인 1764년부터 1770년까지 전후 7년 동안에 쓴 이 『고백록』은 제5장까지를 영국에서, 6장에서 11장까지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그리고 12장을 파리에서 썼고, 전장인 6장까지 1781, 후반 6장은 1788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고백록』은 자서전적인 자신의 회고담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는 이유를 살펴서 스스로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자기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모든 사건을 들어,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는 어디까지나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의 기술은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부정확한 데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고 감정의 진실성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루소는 때때로 감정의 흐름이 감미롭기도 하고, 자연에 도취되기도 하고, 이상적인 꿈을 통해서 현실의 사회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은 작자 루소 자신이 빠진, 이른바 자기모순 대립으로 고민한 인간적 매력을 그대로 풍기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되자 비난과 찬사가 엉켜서 그 반향이 대단했다. 이것을 미리 알았던지 루소는 이 『고백록』 끝머리에, “나는 진실을 말했다. 만약 누가 나의 말에서 모순된 것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증거를 보이더라도 조작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에게 와서 그 진가(眞假)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의도 진실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고 하여 비난을 못 박았다. 위대한 사상의 씨를 뿌린 루소는 확실히 도덕적으로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1765년 볼테르는 익명으로 ‘시민의 감정’이라는 글을 통해 루소의 과거의 부도덕한 행동을 폭로했다. 루소는 1789년 7월 2일 중풍으로 죽었다. 볼테르와 나란히 있던 무덤을 광인(狂人)들이 심야에 파헤쳐서 루소는 유골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루소의『고백록』은 아마 루소의 저술들 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일 것이다. 출판되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소설 <쥘리>혹은 <신엘로이즈>는 19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사회계약론>은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들 중 하나로 꼽히지만 실제로 대중들의 애독서가 된 적은 없었다. 반면『고백록』은 대중들이 자서전 전반에 대해 점차 고조되는 흥미를 보이는 가운데 여전히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고백록』이 루소의 작품들 중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루소는 풍부한 기억력과 강렬한 상상력을 통하여 그리고 삶의 모든 미묘한 색조들을 표현하는 다양한 문체를 구사하면서 과거를 영원한 현재로 창조한다. 무엇보다도 루소는『고백록』에서 어떤 초개인적 가치에 기대지 않고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자연적 심성의 선량함을 자아의 기원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을 창조해나가는 자아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이 점에서야말로『고백록』이 최초 현대인의 초상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