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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꽃'의 의미는...

by 언덕에서 2013. 8. 14.

 


 '꽃'의 의미는...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육사시집(陸史詩集)>(1946) -

 

 

 

 


 

이육사가 문학 활동을 한 때는 문학사적으로 보아 문단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또는 변절하여 친일문학으로 타락했으나, 그는 끝까지 민족적 신념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했다.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을 보이면서도 <절정><광야><꽃>에서 보듯 서정을 잃지 않은 저항시를 썼으며, 상징적인 수법으로 암흑 속에서도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다. 위의 시 <꽃>에서 생명이 부정되는 극한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역설적인 '꽃'은 암담한 현실 상황과 대립되는 동시에, 화자의 현실 초월 의지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겨울과 새벽을 고통의 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1935년을 전후해서 쓰였는데, 이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 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정서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의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엄격한 양반교육과 함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시대적인 추세와 함께 개화한 조부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등 일찍이 반봉건 인간해방의 실천적 삶을 이육사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이육사는 항일의식이 강한 외가, 친가의 영향을 받아 1925년(22세), 항일 무장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북경,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반일제ㆍ반봉건ㆍ민족 해방ㆍ인간 해방의 선봉에 서서 17회의 옥고를 치르며 머나먼 이국땅 북경에서 옥사하면서 까지도 일제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조선 남아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1930년대는 예술지상주의, 주지주의, 풍자, 전원문학 등 주로 현실 도피적인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육사는 반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이게 만드는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온 겨레의 살 길인 민족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고 수십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민족해방과 인간해방에 대한 믿음과 전망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육사는 북경 생활 4년만인 1944년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되어 북경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옥사(獄死)했다. 그는 시 ‘광야’에서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고 노래했던 곳, 그 이국(異國)의 차디찬 감옥에서, 광복이 찾아오기 전에 눈을 감은 것이다.

 민족의 장래에 대한 고뇌와 염려가 없다면,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가 저들에게 또 다른 치욕을 당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다.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고귀한 투쟁을 한 선열들의 뜻을 되새기며, 엄숙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