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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이대근, 이 댁은>

by 언덕에서 2013. 5. 21.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이대근, 이 댁은>

 

 

 

영화 <이대근, 이 댁은>은 도장가게를 하며 홀로 살아가는 이대근 노인의 이야기로 자식의 사업 실패와 큰아들의 외도에 따른 이혼 위기, 딸 내외의 교통사고 등의 에피소드 속에 개인주의가 만연된 현 사회를 풍자하는 영화다. 2007년 심광진이 감독하고 이대근이 오랜만에 주인공을 맡은 독특한 작품이다. 지난 어버이날 케이블을 통해 본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세대의 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과연 그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어떻게 키워냈고 지금은 또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까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노인네가 뒤뚱뒤뚱 논두렁을 걸어가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이라기보다 1960년대 기록사진에서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의 곁에 있는 아내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기름으로 곱게 가름한 쪽찐 머리, 언젠가 흑백사진 속에서 본 듯싶은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고희가 된 노인 이대근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적적한 나날을 보낸다. 그나마 도장 파는 일과 족발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전부다. 자식이 셋이나 있다지만 그의 곁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만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채 잠든 노인 앞에 고급 승용차가 등장하고, 노인은 자식들을 만나러 어디론가 향한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 아래 펼쳐진 집안 풍경은 왠지 낯설고 기이하다. 큰아들 내외, 작은딸 내외의 등장 역시 연극적이다.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듯 그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말을 타고 들어오는 손자나 택시기사 옷을 입은 목사 사위도 역시 어색하다. 영화는 이 어색한 풍경의 진실을 밝히면서 완만하던 호흡을 숨차게 밀어붙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악극단 딴따라로 평생을 허비했지만, 결국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장방에 주저앉은 이대근 노인이 있다. 그는 집안 대소사는커녕 자식도 나 몰라라 아내에게 맡기고 살아온 전형적인 마초형 아버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과 막내의 실종 등 예기치 않은 사건들은 결국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놓는다.

 3년이 훌쩍 지나고, 죽은 아내의 제삿날을 맞이해 이대근 노인은 자식들을 불러 모으기로 결심한다.

 절대적이고 권위적이던 아버지 이대근에게 자식들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2남1녀 자식들은 유년시절의 한풀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라고 외친다.

 바람 잘 날 없는 큰 아들의 바람기 때문에 잘난 체면 몰수하고 흥신소에다 남편 뒷조사를 맡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 큰며느리는 오늘도 서슬이 퍼렇다. 막내딸 부부는 하필 말도 안 통하는 미군과 접촉사고를 내는 통에 경찰서를 한바탕 들쑤셔 놓고 난리법석이다. 단체로 말썽인 아들딸 내외와 할 줄 아는 건 자식들에게 호통치고 소리 지르는 일 뿐인 아버지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 집안이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아내의 제사는 시작되지만, 막내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딸은 십자가를 끌어안고, 절하는 것을 거부하며 아버지와 대치 중이다.

 하지만 3년 만에 찾아오는 자식들을 기다리며, 녹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조는 모습은 ‘강한 남자’ 이대근과는 거리가 멀다. 눈을 부릅뜨고 걸쭉한 목소리를 뱉어내던 그의 모습은 간데없고, 주름진 얼굴에는 황혼의 문턱에 들어선 회한만이 서려있다. 아내의 제사가 끝나고 불이 꺼진 집안에, 노인은 조명이 꺼진 연극무대의 배우처럼 서있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3분의 1을 관통하는 가쁜 호흡은 반전이라고 부를 법한 비밀로 가득 차 있다. 젊은 시절을 길에다 버린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 돼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의 애정을 요구한다.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남자가 인생의 뒤안길에 들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 영화 <이대근, 이 댁은>은 마초적 남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대근을 기용해 자신만의 삶을 살았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아버지들,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의 초라한 노년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등한시 여긴 세대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에게 가족은 내버려두어도 대략 알아서 살아가는, 굳이 애정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낳아놓으면 대략 성장해가는 그런 존재로 표현된다.

 이 영화에 투영된 왜곡스런 가족상(像)은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간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에 너무도 당연하게 아들의 애정을 요구하고, 아들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아니기에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이 불행한 가역반응 속에서 관계는 틀어지고 외상은 깊어진다. 가족이기에,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이기에 생겨났던 아픔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되는 셈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사회문제인 노인문제 또한 이런 맥락일 것이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방탕한 세월을 보내고 뒤늦게야 아들 세대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호소한다. 이는 두 가지의 달라진 세태를 보여준다.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윤리적 공경이 이제는 필수적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며, 둘째는 아버지가 그 이름만으로 권력이나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가 중요시했던 대가족제도의 구조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대가족제도, 공자는 격변하는 전쟁터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서 개인이 가장 보호되어야 할 곳이 가족이라고 믿었다. 그 제도는 수 천 년을 이어져 전 세대까지 존재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폭력적이며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지만 당신들은 정작 그럴 수 없는 노인 세대에게는 답답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가족이라는 윤리로 보호받지 못하는, 과거의 잘못을 소급해서 점검당해야만 하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존재는 축소되고 무시된다.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일까? 1990년대 말 IMF 사태와 함께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소설 ‘가시고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말없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제시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은 사실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인’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를 길러내는 가운데 ‘난쟁이’가 되어야만 했던 산업화 시절의 아버지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머니를 생의 근원과 안락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환기하는 데 비해 아버지에게는 비교적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렇게 혼자 외롭게 있어도 될 법한 강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 이젠 영화에 대한 생각의 결론을 내어보자.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이 되는 날,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은 <이대근, 이댁은>의 아버지에 비해 어떤 모습일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게 되고 이게 또 번뇌가 되어 생을 괴롭히게 되니,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들은 대로 ‘자식과 인연을 끊고 살아야 하는 것’이 가장 현답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혹시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버림받는 모습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