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시집 감상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by 언덕에서 2013. 7. 1.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한 이성복의 첫 시집이다.  <그날>, <어떤 싸움의 기록>, <모래내> 등의 시가 실려 있다.  1982년 제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이 시집에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냉소주의와 대담한 형식파괴가 담겨 있다. 혁명적이라 할 만큼 과감한 시문법의 파괴와 번뜩이는 비유가 가득하다. 현재의 불행을 구성하는 온갖 누추한 기억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시어들은 마치 초현실주의 시를 대하는 듯하다. 왜곡된 현실을 고발하는 작가의 독특함이 엿보인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로도 보편성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1980)-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모래내 1978년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끝까지 흔들리고

시간(時間)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속인 듯 아득히 기적(汽笛)이 울고

웃음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튀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우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 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 번 너는 뒤돌아보아야 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1980)-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어떤 싸움의 기록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1980)-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그해 가을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軍人 간 친구의 便紙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濟州産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南美紀行文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國産映畵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해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高架道路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速度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天賦의 白痴는

서울역이나 창경원에 버려졌다 그해 가을 한 승려는

人骨로 만든 피리를 불며 密敎僧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房門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美化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卑下시키지도 않는 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移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 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1980)-

 

 이성복 시인은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