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시집 『리스본 행 야간열차』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황인숙(1958 ~ ) 시인이 『자명한 산책』 이후 4년여 동안 발표한 작품 중 총 57편을 가려 묶은 여섯 번째 시집이다. 언어의 혼동, 목소리의 혼란 속 틈새의 발견이 사물이나 관계의 명징함을 깨우치는 것 이상으로 근사하고 의미 있는 작업임에 독자들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쇠락이 교묘하게 공존해 있는 대륙의 끝, 항구도시 리스본을 향해 달리는 야간열차에 실린 시인의 몸과 마음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집이다.
파두 - 리스본行 야간열차
잠이 걷히고
나는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어떤
암울한 선율이
방울방울
내분비內分泌됐다
공기가 으슬으슬했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한층 더 으슬으슬하고 축축한
어둠이었다
끝없이 구불거리고 덜컹거리는
産道를따라
구불텅구불텅
덜컹덜컹
미끄러지면서
(이 파두,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
나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탱탱해졌다
오줌으로 가득 찬
방광처럼.
-시집 <리스본 행 야간열차>, 문학과 지성사
카페 마리안느
“누군 저 나이에 안 예뻤나!”
스무 살짜리들을 보며 중년들이 입을 모았다
난,
나는 지금 제일 예쁜 거라고 했다
다들 하하 웃었지만
농담 아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날이 훠언한
못생긴 내 청춘이었다.
-시집 <리스본 행 야간열차>, 문학과 지성사
황인숙 시인은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고,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0),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자명한 산책』(2003)이 있다.
언덕 위 교회당
서울역 철로 위 염천교 건너면
구둣방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발목 시큰한
하이힐들이 맵시 뽐내는 가게도 있고요
구둣방들 저마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소리 삼키고 구두들이
우직히 임자를 기다립니다
그 거리 끝 횡단보도 앞에서 보았습니다
나무들 울창한 언덕 위
뾰족지붕 교회당
오후의 햇빛 아래 나뭇잎들 일렁이고
내 마음 울렁였습니다
살랑 살랑 살랑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 살랑입니다
신호등이 몇 번 바뀌도록 멈춰 서
언덕 위 교회당을 바라봤습니다
먼지처럼 자욱한 소음 속
우뚝 솟은 언덕 위 교회당
첨탑 끝 하늘 그 너머로
내 마음 내닫습니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수 켤례 구두 닳도록 지난 길 되돌아가는
그립고 먼
언덕 위 교회당
-시집 <리스본 행 야간열차>, 문학과 지성사
이 시인은 초기시부터 경쾌한 언어 감각으로 대상에 탄성을 부여하는 시의 상상력과 누추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집중된 에너지를 드러내는 개성적인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특히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일상에 대한 전복과 일탈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지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촌
보랏빛 감도는 자개무늬 목덜미를
어리숙이 늘여 빼고 어린 비둘기
길바닥에 입 맞추며 걸음 옮긴다
박카스병, 아이스케키 막대, 담뱃갑이
비탈 분식센터에서 찌끄린 개숫물에 배를 적신다
창문도 변변찮고 에어컨도 없는 집들
거리로 향한 문 활짝 열어놓고
미동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길을 따라서 샛길 따라서
썩 친숙하게
빛바랜 셔츠, 발목 짧은 바지
동남아 남자가 걸어온다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 흔들며, 땀을 뻘뻘 흘리며
햇볕은 쨍쨍
보랏빛 감도는 자개무늬 목덜미 반짝
-시집 <리스본 행 야간열차>, 문학과 지성사
황인숙의 시세계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그 시적 ‘묘미와 깊이’가 큰 폭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눈에 내용과 형식의 간결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언어의 혼동, 목소리의 혼란 속 틈새의 발견이 사물이나 관계의 명징함을 깨우치는 것 이상으로 근사하고 의미 있는 작업임에 주목하게 한다. 이 시인은 등딱지처럼 지고 가는 물리적 시간의 무게도 가뿐히 압축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순간의 기억을 올올히 새긴다. 단지 주어와 술어가 자리를 바꿔 앉거나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건너뛴 그 자리에서 얄밉도록 짤막한 그러나 긴요한 시구를 뽑아내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시집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정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0) | 2013.07.08 |
---|---|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0) | 2013.07.01 |
김춘수(金春洙)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0) | 2013.06.17 |
홍윤숙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0) | 2013.06.10 |
김영랑(金永郞)의 제1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 (0) | 2013.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