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소설『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 김만중(1637 ~ 1692)의 국문(한글)소설로 필사본 외에 후손인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있으며, 1914년 영풍서관판과 17년 박문서관판의 활판본이 있고, 1955년 김민수가 교주를 달아 [현대문학]에 소개하였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희빈을 총애하는 것을 옳지 않게 여겨 이를 풍자하여 쓴 목적 소설로, 작중인물 중의 사씨부인은 인현왕후를, 유한림은 숙종을, 요첩 교씨는 장희빈을 각각 대비시킨 것으로, 궁녀가 이 작품을 숙종에게 읽도록 하여 회오시키고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인현왕후를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주인공 사씨 부인의 생애는 인현왕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주인공 사씨는 조선 사회의 현숙한 부인의 상징으로 현모양처의 전형적 인물로 그려져 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 15년∼18년 사이에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지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일부다처주의 가정 속에서 처첩 갈등을 중심으로 한, 가정 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어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하다. 그리고 교씨와 동청 등의 모자들의 활약과 적나라한 욕망의 표출, 일방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정실부인, 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시비들의 역할 등은 후대 가정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
이 작품은 특히 숙종 때, 장희빈 사건과 유사하여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정비로 세운 것을 풍자하여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지었다는 주장에 일찍부터 제기되기도 하였다.
서포의 종손인 북헌 김춘택이, "서포는 한글로 소설을 많이 지었다. 그 중 <사씨남정기>는 보통 소설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소설이란 한결같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백성을 계몽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는 이 <사씨남정기>가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다."라 했고, 이규경이 <오주연문>에서 <사씨남정기>를 쓴 동기를,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희빈을 맞아들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왕을 깨우쳐 뉘우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풀이했다. 즉 이 작품이 일종의 '목적소설'임을 암시하는 말들이다. 이 소설이 숙종의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이 숙종의 손에 들어갔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 명 나라 때 유현의 아들 ‘연수’는 15세에 장원 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그 후 현숙하고 학문에 재주가 있는 사씨와 결혼했으나, 사씨는 9년이 되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여 유한림에게 권하여 교씨를 후실로 맞아들이게 했으나, 간악하고 시기가 많은 교씨는 온갖 거짓말로 사씨를 모략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 후 교씨는 문객 ‘동청’과 짜고 천자께 유한림을 모략하여 그를 멀리 유배시킨 다음 동청이 지방관이 되면서 유한림의 전 재산을 가지고 떠나다가 강도를 만나 모두 빼앗긴다. 그 후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석방되고, 사씨를 다시 만나 정실로 맞이한 후에 교씨와 동청을 잡아 처형한다.
위의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처첩의 다툼을 그린 소설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사씨는 조선 사회의 현숙한 부인의 상징이며, 현모양처의 전형이다. 특히 김만중이 인현왕후를 염두에 두고 썼기에 사씨부인의 생애는 인현왕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여주인공 사씨는 인종만을 미덕으로 아는 전형적인 열녀형이다. 질투나 시기는 칠거지악이라 하여 교씨를 미워하지 않았고, 무자식이 큰 불행이라 하여 첩을 손수 맞아들이는 것이 그렇다. 한 마디로 운명적 여인이며 고진감래의 표상이다. 이 작품은 숙종과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는 한글 소설로서, 후처의 모략으로 전처를 내쫓으나 마침내 후처의 간계를 깨닫고 다시 전처를 맞아들인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정비로 세운 것을 풍자하여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지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숙종 개인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종의 윤리 비판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 소설 논의에서, 소설을 도덕적 효용론 관점에서 긍정할 때 항상 "사씨남정기"가 대표적 작품으로 거론되었다.
소설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가정 소설의 전형으로서 후대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의 전범이 되었다고 보인다. 후대의 여성 독자층의 요구와 기호에 맞추어 처첩간의 갈등, 축첩으로 인한 가정 내의 비극이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채택되고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은 장편 소설의 기틀을 보여 준다. 여기에 영웅 소설의 요소를 가미하면 장편 소설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 "남정기"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확실한 창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로 유배, 배소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므로, 1689년(숙종 15)에서 작자가 세상을 뜬 92년(숙종 18) 사이에 썼을 것으로 본다.
작자는 한국 문학이 마땅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 한문소설을 배격하고 이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이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잠잠하던 소설문학에 허균의 뒤를 이어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소설을 천시하던 당시에 참된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 소설을 씀으로써 이후 고대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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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는 서포가 직접 지은 소설이 아니라 명나라 가정시대(1522∼1566) 때 실제 인물인 유연수의 부인 사씨가 쓴 <열녀전>(3권) 속에 수록된 ‘남정기’를 간추려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역사 연구가 김세곤은 최근 경북 안동의 풍산 김씨 문중에서 입수한 <유사종시기>라는 제목의 남정기 한문본에 이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김씨가 발견한 책은 가로 24cm, 세로 18cm의 한지 54장에 한자 2만1천6백 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남정기를 쓰게 된 연유를 담은 <유사종시기>(劉謝終始記) 부분이 36장 1만4천7백60자이며, 나머지 부분은 김춘택의 시 <부벽루>와 <반영소문주석>(潘榮訴文註釋)으로 되어 있다.
서포의 형은 김만기인데 그의 딸이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였다. 즉 김만기는 임금의 장인(부원군)이다. 당시는 당쟁이 치열했는데, 그들은 서인당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므로, 남인당과 극심히 대립하고 있었다. 인경왕후가 죽자 인현왕후(민비)가 계비로 들어왔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아들을 못 낳고, 희빈 장씨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균>으로 뒤에 <경종>이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포는 숙종에게 '장씨가 천첩 소생이라는 말도 있으니,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수양하라'고 아뢰자 화가 난 숙종은 김만중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 보낸다. 드디어 인현왕후 폐비사건이 발생하고 <균>이 왕세자로 책봉되며, 희빈 장씨가 왕비로 승격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 유배지에서 이 작품을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을 분석해 보면, 사씨가 남쪽으로 쫓겨 갔다는 뜻으로 결국 진실이 밝혀져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혹자는 '남정(南征)'의 의미를 '남인 정벌'의 의미로 해석, 인현왕후를 편들던 서인의 거물 김만중이 자신의 정치적 복권을 노리고 썼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허구의 세계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과를 혼동해선 안된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현실로부터 유추된 허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을 사실대로 기술할 뿐이며, 소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숙종은 서포가 죽은 뒤 인현왕후를 실제로 복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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