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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남장 여인 금원의 19세기 조선 여행기 『호동서락을 가다』

by 언덕에서 2013. 8. 27.

 

 

 

 

남장 여인 금원의 19세기 조선 여행기 호동서락을 가다 

 

 

 

 

 

우리역사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묻혀있는 위대한 인물이 많다. 이 책의 주인공인 금원(錦園. 금원김씨.1817.순조 17~?) 도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금원이라는 호 외에 성도 이름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미지의 인물이다. 열네 살 나이에 남장을 하고 혼자 금강산에 올라 ‘하늘과 땅을 한 가슴에 담을 수 있겠다’고 기개를 토할 정도로 거침없는 여인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 동인인 ‘삼호정시사’를 결성했고, 뛰어난 기행록 《호동서락기》를 썼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쓴 유일한 문집인 《호동서락기》를 토대로 그녀가 다녀간 여행지를 답사하며 금원이란 인물을 추적한다. 그녀의 성과 집안에 관한 의문은 물론 잘려나간 듯 사라진 그녀의 삶 일부분들을 차근히 풀어내어 그녀의 일생을 복원한다.

 

 

 

 

 여성은 문밖출입도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 후기, 담장 밖 세상을 꿈꾼 소녀가 있었다. 열네 살에 남장을 하고 홀로 조선 강산을 유람한 금원이 그 주인공이다. 1830년 춘삼월, 고향 원주를 나선 그녀는 제천·단양·영춘·청풍을 거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문명의 도시 한양까지 여행한 후 그 감동과 궤적을 기행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1850)'로 엮었다.

 아쉽게도 금원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여행 후 '금앵'이란 이름의 원주 기생이 됐고, 스물아홉에 의주 부윤 김덕희(1800~1853)의 소실이 됐다는 정도다. 성이 김씨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조차 확실치는 않다. 저자는 '호동서락기'를 토대로 그녀가 밟은 여행지를 순서대로 답사하며, 금원이란 여성을 추적한다.

 첫 여행지는 제천 의림지다. 금원은 부모를 졸라 마침내 여행을 떠나게 된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세이고 천리마가 재갈에서 벗어나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이어 금원은 양양 낙산사의 일출을 보고 나선 "흐린 구름을 뚫고 둥근 바퀴가 솟아오르니 펄쩍펄쩍 뛰며 춤을 추고 싶었다."고 썼다.

 '19세기 신여성'의 당찬 여정을 따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퍼즐 조각을 맞춰가며 '여류시인 금원'을 복원한 저자는 "그녀가 책에 부모와 성(姓)을 밝히지 않은 것은 독특한 자의식으로 보인다."며 "시대를 앞선 의식의 소유자였다"고 평했다.

 

 

 

 

 조선 후기 헌종 때 여류시인 금원은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김덕희의 소실으로 알려져 있고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어려서부터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한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면서 같은 시우(詩友)이며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의 <죽서집> 발문에서, “함께 후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서로 창화(唱和)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1830년(순조 30)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 27세로 문명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에는 김덕희와 함께 관서지방과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三湖亭)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ㆍ경산(瓊山)ㆍ박죽서(朴竹西)ㆍ경춘(瓊春) 등 비슷한 신분의 양반소실들이었다.

 1850년에는 <호동서락기>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ㆍ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ㆍ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남장을 하고 금강산에 오른 금원금원 그녀가 남긴 시를 살펴보자.

 

-제천의림지에서-

 

못가에 수양버들 푸르게 드리우고

엷은 봄 시름을 아는 듯하네.

나뭇가지의 꾀꼬리 쉬지 않고 울어

이별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하네.

 

 조선중기 (1817년) 강원도 원주 봉래산 기슭에서 태어난 금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살롱(Salon)문화를 창시한 여걸이다. 그녀는 시세말로 비주류로써 사회참여 운동가며, 여행가이자 시인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시는 그녀가 14세(경인년,1830년)때 남장을 하고 금강산, 강릉, 평양, 의주, 한양을 유람할 때 제천의 의림지에서 한나절을 구경하고 읊은 시이다.

 그녀는 한 나절 밖에 머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별의 슬픔을 견디기 어렵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주 당차고 야무진 소녀이다. 여행을 허락받은 금원은 새장에 갇혀있던 매가 새장을 나와 푸른 하늘을 솟구쳐 오르는 것 같고, 야생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곧장 천리를 치닫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든 물 동쪽으로 다 흘러드니

깊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구나.

이제야 알았노라 하늘과 땅이 커도

내 가슴속에 담을 수 있음을~

 

 그녀는 여행기를 <호동서락기>라는 제목으로 남겼다. 유람의 극치인 금강산을 돌아보고 산문을 나와, 멀리 하늘과 한 빛으로 펼쳐진 푸른바다를 바라보던 금원은 문득 허공에 올라 바람을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천하를 다 둘러봐도 금강산에 버금 할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이 시 한수를 짓는다.

 그녀는 이제 하늘과 땅이 아무리 크다 해도 내 안에 담을 수 있을 듯하다고 읊었다. 자아가 우주를 끌어안을 정도로 확장되는 경험을 한 것이 라고 할까? 그녀는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한양 구경을 한 후, 시골에서 성장하여 스스로 안목이 좁은 것을 웃으며 성 안을 두루 살펴보니, 비로소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아 이제야 알았노라(方知)” 를 연발한다.

 금원이 남편 김덕희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간 후 그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녀도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조선 최초로 여성 시모임을 만든 여장부 김금원(금원김씨). 양반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글을 배웠으며, 열네 살에 남장을 하고 혼자 금강산을 유람했으며, 사대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파한 그녀는 스물아홉에 여류 시인들과 함께 시모임을 만들어 시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집념의 여류, 그녀는 남자들만의 세상 속에서 좌절된 꿈과 희망을 글에 담았으며 그리고 세상에 이름을 남긴 호걸이었다.

 

 

 

☞저자 최선경은 여성의 시각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역사 관련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는 2003년 9월에 시작한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주최 ‘여성문화유산해설 자원활동자’ 양성과정을 시작으로 여성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004년 3월 여성문화유산해설사 모임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직접 발로 뛰면서 여성의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처음엔 유적지 해설과 관련된 조선의 왕비사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궁궐에 가서도 왕비와 궁녀 등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 받으며 살아야 했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살폈고, 왕릉도 왕비 능을 위주로 답사했다.

 그녀는 2004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여성관련 유적지 지도를 만들었고, 2005년에는 이를 자료집으로 묶어내면서 조선시대 왕비를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는 허난설헌과 신사임당, 의병대장 윤희순 등 여성인물을 찾아 떠나는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중심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였던 후궁의 이야기를 연구하여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왕을 낳은 후궁들』,『호동서락을 가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