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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김만중(金萬重) 시화평론집 『서포만필(西浦漫筆)』

by 언덕에서 2013. 1. 23.

 

 

 

김만중(金萬重) 시화평론집 『서포만필(西浦漫筆)』

 

조선 후기 선비 김만중(金萬重.1637.인조15∼1692.숙종18)이 지은 수필ㆍ시화평론집으로. 2권 1책. 필사본이며.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내용은 거의 같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여재서새시(余在西塞時)’라는 대목으로 보면 1687년(숙종 13) 선천(宣川) 유배 이후인 말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서포만필」권두에 김춘택(金春澤)의 서문이 있다. 권1인 상권에 102조, 하권에 161조 등이 실려 있다. 내용의 대부분은 우리나라 시에 관한 시화(詩話)로 이루어져 있다. 또 소설이나 산문에 관계되는 것도 섞여 있어 수필ㆍ평론으로 다루어야 할 것도 있다. 「서포만필은 작자 김만중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한 지식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기사들이 엿보인다. 불가ㆍ유가ㆍ도가ㆍ산수(算數)ㆍ율려(律呂)ㆍ천문ㆍ지리 등의 구류(九流)의 학에 대한 견해가 점철되어 있다.

 이 책에는 불가에 대한 작자의 긍정적 시각이 여러 번 나타난다. 이 때문에 지배 이데올로기가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진작부터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의 형태를 유지하여 전해지게 된 것 같다.

남해 노도

 

「서포만필은 문학관의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한·중 문체의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조선조 시가관 그리고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소위 ‘국민문학론’ 등 김만중의 선각적 이론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여항(閭巷)의 나무하는 아이나 물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비록 쌍스럽다 하지만, 그 참값을 논한다면 사대부들의 시부(詩賦)보다 낫다고 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사대부들의 시문이 중국 한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를 앵무새의 노래와 같다 하여, 조선 사람은 조선의 말로 글을 써야 한다는 높은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

「서포만필은 김만중의 진솔한 문학관ㆍ불교관ㆍ유교관ㆍ도교관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만중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다.

「서포만필의 이본은 현재 등사본으로 문림사본(文林社本)ㆍ고려대학교 도서관본이 있고, 수사본(手寫本)으로 조윤제(趙潤濟)ㆍ이가원(李家源)ㆍ임창순(任昌淳) 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 등이 있다. 1971년 통문관에서 <서포집(西浦集)>과 함께 합책하여 영인하였다.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서포만필은 수필과 평론집이라 할 수 있다. 김만중의 생각과 견해, 특히 문학관과 종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이 문집은 우리나라 비평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의 진보적인 문학관은 우리나라 말과 글에 대한 사랑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자기나라 말로 쓰이지 않은 시문(詩文)은 앵무새가 사람의 흉내 낸 것과 다름없다고 혹평한다. 다음 글에는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송강의 <관동별곡>, <전후 사미인곡>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 초나라의 굴원이 지은 유명한 서사시)이나, 그것은 한자로서는 쓸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입으로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칠언시(七言詩)로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 없었다. 혹은 택당(澤堂)이 젊어서 지은 작품이라 하지만 옳지 않다. 구마라습(鳩摩羅什: 인도의 승려)이 말하기를, “천축인(인도인)의 풍속은 문채(文彩)를 가장 숭상하여 그들의 찬불사(讚佛詞: 부처를 찬양하는 노래)는 극히 아름답다. 이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만 알 수 있지, 그 말씨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치가 분명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해 말의 가락이 있는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 않더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실로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다 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유독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중국의 시문과 십분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나무하는 아이들이나 물 긷는 부녀자들이 서로 화답하며 노래 부르는 노래가 상스럽다 하나, 만일 그 참과 거짓을 두고 말한다면, 결코 학사대부(學士大夫)의 이른바 시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삼별곡(三別曲 : 정철의 <관동별고>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천기(天機: 하늘의 비밀, 심오한 생각)의 자발(自發: 스스로 나타남)함이 있고, 속세의 비리함도 없으니, 예로부터 좌해(左海: 우리나라)의 진문장(眞文章)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새 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속미인곡)이 가장 높고, <관동별곡> <사미인곡>은 오히려 한자어를 빌어서 수식했다 하겠다.

 

 이렇듯 김만중은 우리말과 글이 지니는 중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이를 사랑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견해에 불과할지 모르나, 당시는 오직 한문만이 참된 글로 인정되던 시대였다. 심지어 실학파의 거두인 다산 정약용조차 우리 글로 쓰여진 소설류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뿐이며, 모든 사람이 여기 빠지게 된다면 자신의 본업을 소홀히 하게 될 테니 절대로 힘쓸 것이 못 되며, 나라 안에 있는 소설을 모아 불태워 버리고 사들이는 자에게는 무거운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때이다.

 이렇듯 우리말과 글이 천시되던 시대에 또 소설이 핍박받던 시대에 우리말과 글로 된 것만이 참된 문학이며, 또 소설이 유익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서포만필>에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을 백해무익한 잡서(雜書)로만 여겨오던 고루한 시대에 이런 주장을 과감히 펼치면서, 자신이 직접 한글로 소설을 지어 지은이가 자기임을 명백히 밝힌 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이때 대부분의 문인들은 비난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이름을 숨겨가며 소설을 지었다, 서포는 이 문집에서 소설을 이단시하던 자들에게 큰 각성을 촉구하며 그 대중화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평민이 아닌 양반으로서 소설을 옹호하기란 당시 상황에서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남해&nbsp;노도의 김만중 유적지. &nbsp;김만중이 56세의 일기로 유형의 삶을 마감했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서포만필』은 17세기 말의 시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회의의 정신과 탐구의 정신을 담았으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관용의 정신을 지녔다. 김만중은 이러한 산문정신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맥을 짚듯 사유했다. 스스로 맥을 짚어보는 태도는 권위에 눌려, 혹은 시류에 편승해서 타설을 모방하거나 타인에 뇌동하는 것과 대척점을 이룬다. 주자학설에 대한 맹신이나 불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논박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속류 유학자의 편벽함을 비판했다. 또 그는 상대주의적 시각을 견지했다.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상과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 냉엄한 분석을 시도했다. 김만중은 자기를 철저히 회의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읽고 논리를 지향하는 길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