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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근대 국정개혁서『서유견문』

by 언덕에서 2013. 1. 16.

 

 

 

근대 국정개혁서『서유견문』

 

 

 

 

 

 

조선말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이 1889년 탈고, 1895년 출판한 근대국정개혁서. 국한문혼용체로 556면. 갑오경장 기간 중인 1895년 일본의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 현재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유길준전서>(일조각.1971) 전5권 중 제1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서구기행문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각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근대화 방략서'이라고 할 수 있다.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1882년 여름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 구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30년 만에 부강을 이룬 원인이 서구의 제도와 법규를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구의 진상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조선정부가 구미제국과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 각국 등 바깥 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힐 목적으로 책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그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지은 <서양사정>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국민의 개화 계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책을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발발을 계기로 서둘러 귀국,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실제 집필은 미국 유학 후 연금 기간 중인 188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883년 7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정사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으로 동행해 미국에 유학한 유길준은 1884년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원래 계획했던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1885년 6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포도청에 감금되고 두 달 만에 우포대장 한규설(韓奎卨)의 집에 유폐된다.

 이는 갑신정변 후 청국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개화파를 탄압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의 재능을 아낀 고종과 한규설 등이 그를 보호 활용하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1887년 가을, 민영익의 배려로 그의 별장인 취운정(지금의 가회동에 위치)으로 옮긴 유길준은 심적인 안정을 찾고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자 원고를 재정리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틈틈이 써 둔 원고 외에 각종 외국서적을 번역해 인용 또는 참고하였다. 특히 <서양사정>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거나 비슷한 점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이를 가장 많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포셋(Henry Fawcett)의 <부국책>과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 등도 인용한 흔적이 보인다.

 <서유견문>의 원고는 1889년 늦봄에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연금 상태라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기간 중 일본에 보빙사의 일원으로 가면서 원고를 가져가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순사에서 발간하였다(1895년 4월25일).

 그는 1000부의 책을 찍어 판매하지 않고 정부고관을 비롯한 당시의 유력자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던 갑오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전 20편으로 이루어진 <서유견문>은 크게 서론, 본론, 결론, 그리고 보론의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서론은 제1∼2편으로 세계의 지리를 기술하고 있다.

 세계의 산ㆍ강ㆍ바다의 높이나 깊이 등을 포함해 지나치게 상세하리만큼 세계의 지리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세계는 넓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웅변으로 읽혀진다. 개화 또는 근대화의 출발은 전통의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론은 제3편 '방국의 권리'부터 14편 '상고의 대도'까지 이다. 여기에서는 국제관계ㆍ정치체제ㆍ인민의 권리ㆍ법률ㆍ교육ㆍ상업ㆍ조세ㆍ화폐ㆍ군대ㆍ종교ㆍ학술 등 각 분야의 근대적 개혁의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결론은 제14편 뒷부분 '개화의 등급'이다. 여기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그 방법론을 논하고 있다. 이 글은 당초에는 없었는데, 출판 직전, 갑오경장을 주도하는 시점에서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과 의지를 담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제15편부터 제20편까지는 보론으로, 서양의 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이다. 혼례ㆍ장례ㆍ의복과 음식ㆍ오락ㆍ병원ㆍ교도소ㆍ박람회ㆍ증기차 등과 서양 대도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거의 전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서유견문>에 나타난 유길준의 '근대화론'의 특징은 전통의 장점을 살리고 전통의 단점을 서구의 장점의 도입으로 보완하는 '취장보단(取長補短)'과 전통과 근대의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의 오륜에 기초한 윤리 외에는 모두 변혁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동도서기론'과 구분된다.

 1896년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서유견문> 역시 출간된 지 10개월도 채 안되어 자유롭게 유포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견문>은 시의에 합당해 쓰일만한 서적으로 인식되어 공립소학교 혹은 사립학교의 교과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에 원문 그대로 인용되거나 그 논지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지식인 정치가 계몽 운동가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해 한국의 문자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기존의 한문 위주의 문자생활이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종속관계를 유지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글인 한글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유견문>에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연호를 쓰고 있다. 한글 보급을 확대하려는 그의 의지는 나중에 최초의 국어문법책인 <조선문전><대한문전>(1909)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이 글은 우리나라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기에 쓰인 수필이다. 이 시기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려던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과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이 글은 보여 주고 있다.

 1882년 조ㆍ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길준은 전권대신들을 수행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이곳저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하게 된다. <서유견문>은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유길준은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서유견문>에서 애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한편, 개화 의식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가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관과 국민관을 제시한 이 글은,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 새롭게 눈을 뜬 개화기 지식인의 생각과 고민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이 글은 국한문 혼용체가 개화기 이후 주도적인 문체로 자리 잡는 데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왼쪽 세 번째가 유길준), 앞줄 왼쪽 두번째와 세번째는 홍영식, 민영익

 

 이 책은 한국의 개화사와 지성사(知性史)에서 너무 많이 알려진 책이지만, 실상 그 내용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읽어보면 이 책은 제목처럼 기행문도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이 서양의 문물제도, 민주정치와 법치원리를 소개, 설명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학생시절에 이 책을 한번 읽는다면 선각자가 본 당시의 서양 사정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개방과 국제화의 의미를 새겨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

 한말의 개화사상가 구당(矩堂) 유길준(1856∼1914)에 대해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고 1895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이 어떤 경위에 의해 저술되었는지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초의 일본 유학생ㆍ미국 유학생으로 귀국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 7년간이나 연금생활을 하면서 본서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새삼 상징적으로 보인다.

 유길준은 개화를 설명하되 우리의 전통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서양과 전통을 조화시켜 점진적 개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법에 관하여도 '항구법(恒久法)'과 '변천법(變遷法)'의 조화를 주장하여 역사 법학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이 1백 년 전에 이루어진 사유 방식인데, 1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우리 후손들이 얼마만큼 내실 있게 채워 왔느냐는 진단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최초의 견문서라는 역사성과 현재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한편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해외여행기로서도 흥미진진하다.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의 비보를 듣고 황망히 귀국하는 길에 들른 유럽 여행이라 정확히 언제 어디를 방문했는지 불분명하나 본서에는 8개국 37개 도시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여행 자유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서양을 다녀오지만 <서유견문> 같은 뜻있는 책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급변하는 국제화시대일수록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전통과 개방의 조화를 꾀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첨언... 유길준의 만년은 순탄치 못했다. 

 유길준이 정미7조약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소식은 한국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동안 그를 친일파로 생각했으나 그가 정미7조약을 반대했음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종이었다. 1907년 8월 16일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유길준을 제외하고 모두들 일본 측에서 주는 벼슬을 받았다. 고종은 우선 용용봉정(龍龍鳳亭:흔히 龍鳳亭이라 했으나 유길준은 조호정이라고 불렀음)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흥사단을 만들어 교육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 이 기관을 통해 유길준은 〈대한문전〉·〈노동야학독본〉 등의 책을 저술·간행했다. 그리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소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다. 또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를 설치·운영했다. 유길준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있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그동안 야(野)에서 쌓아 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는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길준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한때 극비리에 노백린(盧伯麟) 등 몇몇 유지와 합동, 서울 시내의 중학생을 동원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집에 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합병이 된 지 40일 가까이 되어 일본당국은 합병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내려 귀족으로 앉히면서 유길준을 회유해보려고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사절했다.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 9월 30일 집에서 죽었다. 임종 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설치했던 흥사단이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1913년 5월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부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