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사는 법』 『내 안의 광야』 『지상의 그 집』 등 다수의 시집을 통해 젊은 날의 회환과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홍윤숙(1925~ ) 시인이 ‘마지막 시집을 엮는다’는 소회로 만든 열여섯번째 시집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는 세상의 풍경 속에 투영된 시인의 정갈한 마음자리가 고스란히 읽힌다.
길을 걷다가 발을 멈추고 뒤돌아본 나뭇가지, 혹은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 피어 있는 진보랏빛 과꽃 같은 일상의 풍경만으로도 시인은 생의 여정을 둘러온다. 황혼녘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시집은, 그러나 남아 있는 길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에 눈길을 주는 생의 따뜻함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쓸쓸함을 위하여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 세워
그 속을 걸어 다니고 싶다고 한다
나는 쓸모없이 널려 있는 낡은 널빤지를 보면
모두 일으켜 세워 이리저리 얽어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서까래를 얹고 지붕도 씌우고 문도 짜 달고
그렇게 집을 지어 무엇에 쓸 것인진 나도 모른다
다만 이 세상이 온통 비어서 너무 쓸쓸하여
어느 한 구석에라도 집을 지어 놓고
외로운 사람들 마음 텅 빈 사람들
그 집에 와서 다리 펴고 쉬어가면 좋겠다
때문에 날마다
의미 없이 버려진 언어들을 주워 일으켜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어 집 짓는 일에 골몰한다
나 같은 사람 마음 텅 비어 쓸쓸한 사람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작은 집 한 채 지어 놓고 가고 싶어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2010)-
여류시인 홍윤숙은 192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재학중 한국전쟁을 겪고 학업을 중단했다. 1947년 문예신보에 시 「가을」을, 1948년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를, 같은 해 『예술평론』에 「까마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장식론』 『하지제』 『사는 법』 『태양의 건넛마을』 『경의선 보통열차』 『실낙원의 아침』 『조선의 꽃』 『마지막 공부』 『내 안의 광야』 『지상의 그 집』 『홍윤숙 시전집』 등 열다섯 권과, 수필집 『자유 그리고 순간의 지상』 『하루 한순간을』 등 아홉 권이 있으며, 시극과 희곡, 장시를 묶은 『홍윤숙 작품집』이 있다.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그러면 창변에 밀감빛 등불 켜지고
미뤄둔 편지 한두 줄 적어넣고
까마득한 시간 저 편에서
가물가물 떠오르는 달빛 같은 얼굴도
만나지 않으랴
먼 강물 흐르는 소리 아득히 쫓아가다
고단한 잠에 들면
잠 속에서 그리던 꿈도 꿀 수 있느니
우물같이 깊고 아늑한 둥지
따뜻하게 출렁이는 밤이 지나면
다시 새날의 해도 떠오르리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늘 무슨 일인가 하고 있다.
주고 잃는 것만큼
어디선가 그만큼씩 채워지고 있는
빌수록 가득 차는 지상의 나날
이제 돌아갈 길도 멀지 않으니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온다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2010)-
한 생애를 정리하면서 돌아다보는 지나온 산하가 아득하기만 하다. 언젠가 방랑(放浪)이란 낱말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신선하고 유혹적이며 심신을 뜨겁게 달구는가를, 청춘의 또다른 말 방랑 ; 다시는 없을 그 푸르던 날들을 아득히 돌아본다. _‘책머리에’에서
섭리
피어난 꽃은 져야 하고
태어난 생명은 죽음을 예비한다
오늘도 한 송이 황홀한 꽃봉오리 속에 숨은
소멸의 섭리를 잠잠히 지켜본다
우리는 모두 지켜보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
경건히 손 모아 그 옆에 서서
망연히 고개 숙이고 서서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2010)-
총 5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는 세상의 풍경 속에 투영된 시인의 정갈한 마음자리가 고스란히 읽힌다. 길을 걷다가 발을 멈추고 뒤돌아본 나뭇가지, 혹은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 피어 있는 진보랏빛 과꽃 같은 일상의 풍경만으로도 시인은 생의 여정을 불러온다.
빈 항아리
빈 항아리 속엔
잡목나무 툭툭 찍어 무작위로 세운
산사 하나 아니 산사도 못되는
암자 하나 있습니다
울타리도 山門도 없는
온종일 비바람과 마른 잎과
정체 모를 모르스가 제멋대로 날아드는 암자엔
먼 길에 핍진한 백발의 나그네 혼자
저녁 등불 켜놓고 앉아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엔 잎 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이 찍혀 있을 뿐
그밖의 계절은 신화처럼 아득하여
추억으로 가는 길도 막혔습니다
나그네는 혼자 종일 문 열어 놓고
산 아래 먼 마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막연히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은 다만 의미없이 길들여진 습관일 뿐
사실은 아무것도 올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덩그렇게 빈 공간이 점점 자라서
어느 날 스스로 묻힐 묘지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온 지상의 집엔
지붕도 있고 서까래도 든든하여
비바람 눈보라 막아 주었으나
안식이 없었다고
지금 텅 빈 항아리 속 해묵은 암자엔
지붕도 문도 없어 비바람 제멋대로 들이치지만
알 수 없는 안식이
따스한 용서의 눈길로 감싸온다고
이미 해 저물어 산도 길도 마을도
어둠으로 지워져 지상의 땅 끝 어디쯤인지도 모를
빈 항아리 속 허궁에 앉아서
끝없이 무변한 광야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따뜻하여 눈물나는
눈부시게 흰 허무의 꽃 한 송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기이한 향기에 가슴 젖어 있습니다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2010)-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마음이 텅 빈 사람들 다리 펴고 쉴 수 있는 집을 지어주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이 짓고 있는 집은 바로, 다름 아닌 그의 詩일 것이다. 세상의 굽잇길을 돌아온 노시인의 솔직한 심경이, 읽는 이의 영혼까지 정갈하게 씻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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