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金永郞)의 제1시집 『영랑시집(永郞詩集)』
김영랑(金永郞) 시인의 제1시집으로 1935년 11월 [시문학사(詩文學社)]에서 간행되었다. 키츠의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란 시구(詩句)가 책머리에 나오는 4․6판, 74 면의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1930년에서부터 1935년 11월 시집이 나올 때까지 쓰여졌던 것이다. 이들 작품의 게재지로서는 [시문학(詩文學)] [문학(文學)] 등을 들 수 있다.
53편 가운데 문예지에 실리지 않고 바로 이 시집에 발표된 작품은 <뉘 눈길에 쏘이엿소><바람이 부는 대로><눈물에 실려 가면> 등 18편인데, 이 제목들은 1948년의 <영랑시선(永郎詩選)> 이후 붙여진 것이다.
처음 발표 때와는 달리 제목을 달지 않고 1에서 53까지 번호로 표시하는 특이한 체재를 취했다. 그의 명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비롯한 초기 서정시의 주옥편들이 수록되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문학] 3호(1934. 4)-
시의 제목이 하나도 없고, 아라비아 숫자의 번호로만 된 시집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가 유명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영랑시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이 시집을 보면 53편의 시가 제목 대신 번호로만 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영랑의 이른바 ‘사행시(四行詩)’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행시’란 단 4행으로 된 시를 이름인데, 영랑은 이 단시(短詩)를 처음부터 제목을 달지 않고 <사행소곡(四行小曲) 칠수(七首)>(시문학 창간호)니, <사행소곡 오수(五首)>(시문학 2호 및 3호) 등으로 발표하였다.
<영랑시집>은 이 ‘사행시’와 조조를 같이 하기 위해 제목이 있는 ‘사행시’ 이외의 작품까지도 제목을 빼고, 번호를 붙여 시집을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의 제목에 소극적이었다고 할밖에 없다. 그것은 그의 일반적인 특성인 때문인지, 또는 주제 의식이 약한 시 경향 때문인지 제목을 중요시하는 일반적인 시인과 그는 달랐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시문학] 창간호(1930.3월호) -
지금 영랑의 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시의 첫 줄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이것도 이 ‘사행시’ 때문인 것 같다. 즉 이 ‘사행시’는 <영랑시집>에서만도 53편 중 반이 넘는 28편이나 된다. 이 작품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편의상 시의 첫 줄을 제목으로 써서 구별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경향에서 본래 제목이 있었던 시라도 시의 첫 줄로 제목이 바뀌어 간 것이다.
1930년대 초기 카프의 관념적인 프로문학이 범람하던 시기에, 작가는 자신이 표방한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견지에서 [시문학] 동인들과 더불어 순수시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하여 쓰여진 그의 작품은 청징(淸澄)한 정서와 새로 시험한 4행시의 유력한 시형(詩型)과 현묘(玄妙)한 운율, 시어 조탁의 정밀․섬세 및 기법의 참신성 등으로 순수서정시의 하나의 절정을 이루고, 또 한국 현대시에의 전환기를 마련한 시집이다.
오월(五月)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드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컷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 [문장] 6호(1939. 7) -
이 시집에서 작가는 ‘내음’, ‘소색이는’, ‘얄개’, 실비단 하늘‘ 등 새로운 조어(造語)와 전라도의 사투리를 발굴, 거기에다 그의 독특한 언어미와 전통적 아악(雅樂) 혹은 판소리의 율감(律感)의 심화 등을 더하여 1930년대 시단(詩壇)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의 시와 더불어 커다란 공적을 우리 시단에 남겼으며, 전통적 계승의 문제에서 볼 때 이 시인의 세계는 소월의 뒤를 이어 서정주ㆍ조지훈 등에 넘긴 한국시의 한 전통세계의 산맥이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의 특징은 유미주의와의 접맥, 섬세하고 순수한 감각을 지닌다는 점, 그리고 서정주의의 극치를 보인다고 하는 박용철의 당대 평가에서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 시집의 시편들에는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시의 예술성, 곧 아름다움 위에 짜여지는 시의 질서에 무게를 두는 시문학파적 창작 의도가 농축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도 이런 점들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밖에도 이 시집에서 보여준 김영랑 시의 구체적인 특징은, 첫째 주로 구체적이고 직감적인 우리말로 쓰여졌다는 점, 둘째 대체로 4행을 한 연으로 하는 형태 의식에 의하여 시가 고르게 쓰여졌다는 점, 셋째 미적(美的) 질서를 통하여 개인적 서정과 자아의 내면을 지향하는 ‘안으로-닫힘’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집에서의 김영랑의 시는 다른 어느 누구의 시보다도 맑고 깨끗한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영랑시집> 이후 1938년부터 1950년까지 이어지는 후기의 변모된 시작 경향(詩作傾向)과는 구분을 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후기의 시편들이, 안팎의 현실적 조건을 만나 ‘밖으로-열림’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 [문장] 18호(1940. 7) -
영랑은 1930년 박용철ㆍ정지용ㆍ이하윤ㆍ정인보 등과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 그해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4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의 3편을 발표하기 시작, [문예월간] [시원(詩苑)] [문학] 등 여러 문학지에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의 시는 섬세하면서도 정서가 언어의 율조와 잘 다듬고 깎아낸 시형(詩型)의 정돈으로 서정시로서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어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5년 박용철의 도움으로 <영랑시집>을 간행하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 이후 대한독립촉성회ㆍ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7개월간 지냈다. 그 해 10월 <영랑시선>을 간행했다.
6ㆍ25전쟁 중 서울에서 은신하다가 포탄 파편에 복부상(腹部傷)을 입고 그 다음날 사망했다.
만년에 민족주의적인 애국시를 많이 발표했으나, 역시 그 시의 본령은 가냘프면서도 질기고, 화사하면서도 애수에 차 있는 순수한 탐미주의적 서정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백조파 시인들과 같이 단순한 감상적 영탄시인(詠嘆詩人)이 아니고, 그 정서를 여과(濾過)ㆍ순화(純化)하여 순수하고 맑은 겨울과 같은 시의 경지 위에 섬세한 상상의 세계를 구김살없이 반영시킨 백조파의 감정시(感情詩)와 현대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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