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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조중환 번안소설『장한몽(長恨夢)』

by 언덕에서 2013. 4. 17.

 

 

 

 

조중환 번안소설장한몽(長恨夢)

 

 

 

 

조중환(趙重桓.조일재1863∼1944)의 번안소설로 3권 2책으로 구성되며 활자본으로 1913년 [유일서관]에서 간행하였다.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신문소설로서 전편이 1913년 5월 13일부터 10월 1일까지 연재되었다가 독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져 다시 속편이 1915년 5월 25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연재되었다. 원작은 일본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지은 <곤지키야샤.金色夜叉)>로, 1897년 1월부터 1899년 1월까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을 번안한 연애소설이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후반부에서는 작자의 창의가 가미되어 원작보다 내용이 풍부하여 훨씬 넓은 세계를 전개함으로써 애정을 중심으로 한 신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하였다. 연극으로는 1913년 8월 [유일단]에 의해 처음 공연되었고, 같은 해 11월 4일 임성구의 [혁신단]이 다시 상연하였다. 1930년 12월에는 또다시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어 여러 판을 찍었다.

 주인공인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련을 그린 작품으로,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하지만, 당시 여러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사랑에 대한 새로운 풍조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이와 같은 큰 인기에 힘입어 영화화, 혹은 가요화되기도 하였으며, 1915년에는 속편이 [매일신보]에 다시 연재되기도 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이수일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인 심택의 집에서 자라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심순애와 혼인을 약속한다. 그런 어느 정월 보름날, 심순애는 김소사의 집으로 윷놀이를 갔다가, 거기에서 대부호의 아들인 김중배를 만난다. 심순애에게 매혹된 김중배는 다이아몬드와 물질공세로 그녀를 유혹하였고, 심순애의 마음은 점점 이수일로부터 멀어져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수일은 달빛 어린 대동강가 부벽루에서 심순애를 달래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한 번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울분과 타락 끝에 고리대금업자 김정연의 서기가 된 이수일은 김정연의 죽음과 함께 많은 유산을 물러 받게 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심순애는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려다가 수일의 친구인 백낙관에게 구출된다. 결국, 두 사람은 백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결합하여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아타미 시의 해변에는 ‘곤지키야샤’의 명장면을 담은 ‘간이치.오미야 동상’이 서있다(左). 오른쪽은 곤지키야샤를 번안한 ‘장한몽’의 표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의 다리를 붙잡고 여자가 매달린다. 남자는 게타(일본 나막신)를 신은 발로 여자를 힘껏 찬다. 그리고 모멸 찬 눈빛으로 내뱉는다. "하나세! 도미야마노의 다이아몬드니 메가 쿠룬다카? (놔라! 도미야마의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었느냐?)"

 '이수일과 심순애'의 일본 원작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한 장면이다. 1897년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소설로 연재,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전.중.후편에 이어 속편, 속속편까지 연재되다 작가(오자키 고요)가 1903년 위암으로 숨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덕분에 작품의 배경인 아타미 시는 일본 열도에 온천 명소로 이름을 알렸다.

 곤지키야샤를 번안한 한국 작품 '장한몽(長恨夢:조중환 작, 1913년 매일신보 연재)은 '이수일과 심순애'란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연재 당시 독자들은 소설을 보려고 신문 배급소 앞에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한다. 객석을 꽉 채운 일본 관객들은 변사를 맡은 김기영씨의 일거수 일투족에 웃고 울었다. 같은 뼈대에 다른 살점들. 두 작품의 맛은 그렇게 같았고, 또 달랐다. 지금은 촌스럽기 짝이 없는 신파 연극(혹은 신연극)이 당시에는 가장 세련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다른 점은 또 있다. 간이치가 오미야를 찰 땐 게타를 신었고, 로맨스의 배경도 아타미의 해변이었다. 반면 이수일은 구두를 신은 채 심순애를 찼고, 공간적 배경도 평양의 대동강변이었다. 15년이란 두 작품의 시차도 다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말도 대조적이다. 4년간 김중배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순결을 지켰던 심순애와 이수일은 해피 엔딩을 맞는다. 권선징악.해피 엔딩.정조 관념 등 고전소설의 틀을 깨지 못한 대목이다. 반면 남편에 의해 강제로 몸을 버린 오미야와 간이치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닫다가 중단됐다.

 일본 호세대학의 가와무라 미나토 교수는 "곤지키야샤 역시 19세기 말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며 "작품의 기본 뼈대와 다이아몬드를 주는 설정, 남자 주인공의 대사 등이 너무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오랜’ 주제, 사랑의 트라이앵글 혹은 삼각관계라는 ‘낯익은’ 구도, 육체적 순결이나 정조에 관한 ‘낡은’ 관념, 사랑이냐 황금이냐는 ‘빤한’ 물음들! 지금이야 ‘오래되고 낯익고 낡고 빤한’ 것들이지만, 1910년의 청춘남녀들에게는 ‘연애’라는 신문물이 던지는 최초의, 그래서 낯선 물음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장한몽》은 근대 초창기 한국인의 연애와 사랑을 본격적인 화두로 꺼내 들면서, 연애와 사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일상생활의 영역이 근대 한국인에게 중요한 문제로 틈입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소설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던 신소설과 고소설을 압도하고 소설과 연극으로 신문학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점은 특기할만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신소설의 퇴조와 함께 이후의 통속적 애정소설의 등장을 재촉했으며, 연극에서도 이후 신파극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그 파급효과가 컸던 작품이다.

 또한,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련을 그린 이 작품은 물질적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한국적 배경과 유형으로 개작되어 수많은 개화기의 독자를 얻은 통속 번안소설로 신문연재 애정소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조중환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본어 학교였던 경성학당을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대학을 마쳤다. 1910년대의 유일한 한국어 중앙 일간지였던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십여 편의 번안 및 창작 소설을 발표했다. 일본 가정소설의 대표작 《불여귀》를 번역하였으며, 《쌍옥루》와 《장한몽》 등을 잇달아 번안하여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최초의 전문 번안 작가였던 조중환에 의해 명실상부한 번안 소설의 시대가 열렸다. 또 번안희곡 〈희극 병자삼인〉을 연재하는 한편 극단 ‘문수성’을 창립하여 초창기 신파극 배우 겸 전문 각색자로 활약했으며, ‘계림 영화 협회’를 창립한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다. 1947년 서울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