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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헤세의 자연과 사색 『정원 일의 즐거움』

by 언덕에서 2012. 10. 31.

 

 헤세의 자연과 사색 『정원 일의 즐거움 

 

 

독일 소설가·시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수필, 시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으로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당 출판사는 '헤세 말투'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나직하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편안한 헤세 말투. 책마다 한국어 번역자가 다를 텐데, 언어가 바뀌어도 그대로 전해지는 감동이 놀랍다. 이 책에도 헤세의 말투는 여전하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정원을 가꾸면서 느낀 점을 쓴 글 모음이다. 헤세는 사는 곳을 옮기면 곧 정원부터 만들었다고 한다. 정원에서 헤세는 자연을 들여다보고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시, 수필로 자유스럽게 씌어진 책장 사이사이 곁들여진 헤세 스스로 그린 수채화들이 마음을 잡아끈다.

 

 

독일 소설가 ·시인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원에 나가서 눈의 피로를 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일만 하고 있으면, 나의 눈은 약해져 며칠 동안 눈물이 나오고 아파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고 나는 하릴없이 앉아 있게 됩니다.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특히 나 자신만의 작은 지옥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원에서 띄우는 작은 편지들

 

 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 순간,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즐거운 정원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세계는 자주 시끄러움과 불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풀과 수목은 변함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날인가 지상이 완전히 콘크리트 상자로 덮여 버린다 할지라도, 구름들의 유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술의 도움을 빌려, 여기저기에 신성한 곳으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열어 둘 것입니다.--- 정원에서 띄우는 작은 편지들

 

 내가 정원 위로 눈길을 보내면, 정원은 단지 황홀해하거나 혹은 무관심한 시선을 던지는 이방인을 보듯이 그렇게 나를 대하지 않는다. 정원은 나에게 무한히 많은 것들을 준다. 지난 수년 동안 밤낮으로, 매 시간마다 모든 계절과 모든 날씨 속에서 정원과 나는 친밀해졌다.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의 잎사귀들과 그들이 꽃피고 열매 맺는 모습은 물론, 생성하고 소멸해 가는 모든 과정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친구였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라도 잃어버린다면 나한테는 친구 한 사람을 잃는 것과 같았다.--- 즐거운 정원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

 

 헤르만 헤세는 서양의 작가들 중 누구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이다. 청춘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책 《데미안》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젊은 날의 고뇌에 대한 증인이며 동반자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동양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방인에게서 낯익은 풍습을 볼 때와 같은 반가움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널리 읽히는 한두 작품을 가진 다른 대가들처럼 헤세 역시 폭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감상적인 청춘 소설을 쓰는 작가로 오해되어 오기도 했다.

 이 책은 헤세의 시와 소설, 산문 들 중 정원에 관한 것들을 가려 뽑고 그가 직접 그린 수채화와 친필 원고, 헤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흑백사진들을 수록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헤세의 모습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비인간적인 기계 문명에 반기를 든 작가이며 폭력적인 세상에 깊이 고뇌한 작가였다. 방랑과 뿌리내림,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고향에 대한 향수 사이의 상반되는 인력 속에서 살았으며, 자연에서 삶의 근원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늙음과 죽음을 견디고 이해하며 성숙에 이른 작가였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

 

 헤세에게 정원은 한가로운 은신처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정원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려 했던 헤세의 구체적인 생활공간이었으며, 혼란스럽고 고통에 찬 세계에서 물러나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정원 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은 사상가이며 명상가로서의 헤세의 내면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며, 현대 문명에 대해 자연과의 유대라는 대안적 삶을 제시한 녹색서이다. 톨스토이, 소로우 등과 같이 헤세는 자연 속에서 인간과 세계의 운명을 성찰하고자 한 작가였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서)과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이 책에 시인 헤세가 세운 나라가 있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

 

 흙의 냄새, 꽃의 색깔, 낙엽의 소리, 공기의 흐름... 아름답고 조용한 전원에서 살고 싶다는 꿈. 하다못해 집 가까이 작은 텃밭이라도 두고 고추 몇 이랑, 상추 몇 포기라도 가꾸어보고 싶다는 꿈. 누구나 한번쯤 그런 꿈을 꿔보지 않았을까.  이 책은 그 묻어 둔 꿈을 일깨운다. 이 책은 정원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 꽃·새·정원의 한 모퉁이를 그린 수채화, 모닥불의 매캐한 연기에 눈이 아리고 저무는 햇살에 가슴이 저려 올 것 같은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빛과 색채, 향기가 배어 나오고 나뭇잎들이, 햇살과 바람이 수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

 

 고독하고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 가지가 잘리고도 끈질기게 새 잎을 내는 떡갈나무, 하늘을 받치는 거대한 아틀라스의 기둥처럼 하얗게 피어 오른 목련, 반짝이며 퍼덕이다 사라져 버린 파란 나비, 어느 알 수 없는 숲에서 유년 시절의 전령인 양 정원으로 날아온 앵무새, 아침의 햇살, 푸른 산줄기, 장미·수선화·재스민의 향기,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자연의 생물들과 무생물들은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삶 속에서 닫히고 왜곡된 우리의 감각을 고요하고 순수하게 열어 놓는다.

 헤세는 일생 동안 여러 번 거주지를 옮겼고, 그때마다 정원을 만들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라고 헤세는 말한 적이 있다. 이 책은 헤세가 보고 듣고 냄새 맡은 아름다움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