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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사물존칭'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by 언덕에서 2012. 10. 11.

 

 

'사물존칭'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9월 25일 자동차 보험 만기일이었다. 내 개인 정보가 어떻게 샜는지 4개의 보험사의 텔레마케터들은 한 달 전부터 거의 매일 전화를 해댔다.

 딱히 알고 있는 보험사가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보험사간 보험료 차이가 궁금했다. 

 그들이 내게 전하는 화법은 천편일률적이다.

 “고객님의 보험료는 얼마이십니다.”

 보험료는 사람이기 아니기 때문에(추상적인 물건이기 때문에) ‘이십니다’가 아니라 ‘입니다’가 맞다.

 

 동네 입구의 제과점에서 빵을 샀다. 계산을 하려하는데 점원 아가씨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 이 빵은 할인된 가격이십니다.”

 사물인 빵에다 높이는 말을 쓰면 구입하는 이에게 결례이다. 내가 빵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이 빵의 가격은 할인되었습니다.”가 맞다.

 동사나 형용사에 붙여 존칭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시-’는 주로 사람을 높일 때 쓰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아닌 사물에 ‘-시-’를 붙여 말하는 소리가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들린다. 서비스라면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항공사. 통신사. 백화점의 경영진도 어색하게 여긴다는 그 어법, 이른바 ‘사물존칭’이다.

 

 

 

 

 

 백화점에서 직원이 손님에게 “이 가방은 30% 세일이십니다”라고 말하거나,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 일은 이제 웬만한 소비자에겐 꽤 익숙하다. 통신사의 콜센터 상담원은 “○○상품은 월정액 3만5000원이시고요”라고 하고, 병원에서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수면내시경이시고요”라고 하며, 골프장에서는 캐디가 “공이 벙커에 빠지셨어요”라고 하고, 동네 식당에선 “더울 때 좋은 건 열무냉면이시고요”라고 한다. 주민센터에서도 “인지(印紙)는 400원이시고요”라고 말하는 공무원이 간혹 보인다.

 모 신문사는 국내 3대 통신사 콜센터 상담원 665명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사물존칭이 잘못된 문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86%)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틀린 문법인 줄 알면서도 사물존칭을 ‘가끔’ ‘거의’ ‘매번’ 쓴다고 답했다. 분석결과는 누가 시키거나 매뉴얼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물을 높이고 있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선배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선배가 바로 ‘리얼타임 매뉴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리얼 타임 매뉴얼’의 발생에는 공포스런 비밀이 하나 더 숨어있다. '악성민원인' 또는 '악성 민원전화'가 그것이다. 악성민원인을 영.미권에서는 'Ugly Customer'라고 부른다.

 

 

 

 

 

 요즘 유행하는 코미디 ‘개그콘서트’를 보면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브라우니’라는 개 인형을 들고 나오는 정 여사가 억지를 부려 업체로부터 매번 상품을 빼앗아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웃자고 만든 코미디겠지만 나는 그 프로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회사가 정한 '친절'의 원칙 하에 성실히 일하는 업계의 종사자들이 볼 때 정 여사는 공포스런 괴물일 것이다. 십수 년 전 유명기업의 CS센터장으로 근무할 당시 그런 부류의 고객들을 매일 접한 경험이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하여 콜센터 상담원에게 성적인 희롱은 물론이고 상습적으로 ‘XX년’ 등 쌍욕을 해대거나, 직접 콜센터를 찾아와 폭언.폭력을 행사하는 악성민원인들이 생각 외로 너무 많았고, 이로 인해 대인공포증이나 우울증. 불면증 등 병을 얻는 직원들을 많이 보았다. 악성민원인들은 CS방침 때문에 회사가 그들을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여직원은 스트레스로 인해 6개월 동안 생리를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상담원들은 괴물과도 같은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과다한 존칭어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CS : Customer Satisfaction 고객만족)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서울시는 120다산콜센터에 전화해 상습적으로 폭언, 욕설, 협박 등을 일삼은 악성 민원인 4명을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지난달 27일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고 4일 밝혔다. 서울시는 이들 4명은 시의 단계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통화 건수나 전화 내용 면에서 악성적인 태도로 일관해 고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A씨는 2010년 6월부터 2012년 8월 사이에 120다산콜센터로 시정과 무관한 1651건의 전화를 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성 상담원에게 이유 없이 반복적인 욕설과 폭언을 일삼아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행위를 지속했다. 올해에만 성희롱, 만취상태 장시간 통화, 폭언ㆍ욕설 등 총 2만여 건의 악성민원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공공기관에서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데 일반 사기업에서는 오죽할까? 2000년도 경부터 기업 간 CS경쟁이 심화됐고, 기술력이 향상돼 모두가 질적으로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럴 때 다른 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과 서비스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어법이 탄생했다. 그걸 미끼로 점점 흉포해지는 고객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객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그들에게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말은 점점 망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