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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악질군주는 누구일까?

by 언덕에서 2012. 9. 25.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악질군주는 누구일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정도 지난 후 우리 후손들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상 으뜸가는 폭군 악질군주로 누구를 꼽을까요? 답은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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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 DPRK)의 2대왕 김정일입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수백만의 백성들이 굶어죽었고 무모한 핵개발로 인해 북한주민들의 민생은 파탄을 맞았습니다. 기쁨조, 문란한 사생활, 사치벽. 나치를 능가하는 대형 매스게임. 체제선전 영화 등 엉터리 예술에의 집착, 광기어린 통치... 탈북자의 증언들을 접하다 보면 그는 일국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인류 역사 이래 찾기 어려운 폭군 자체임을 깨닫기에는 짧은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있고 아사자가 속출하는데 군비증강과 핵개발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독재국가에서 미래는 없어보입니다. 조속히 평화통일이 되어 한민족의 기상을 온 세계에 펼쳐보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해봅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의 뒤를 잇는 악질군주는 누구일까요? 조선의 연산군일까요? 아니면 백제의 의자왕?  태봉국의 궁예왕일까요?

 

김정일(金正日.1942-2011)

 

 

 

 제가 보기에는 고려 28대왕 ‘충혜왕’입니다. 오늘은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드문 폭군이요, 패륜아인 충혜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충혜왕에 관한 기록들을 쭉 읽어가다 보노라면 로마의 폭군 네로왕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충혜왕(忠惠王).1315.충숙왕 2-1344. 충혜왕복위 5)

 

 

 918년 왕건이 세웠던 고려는 제 6대 왕 성종 때의 전성기를 맞았고 1109년 17대 왕 인종 때부터 국력이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자겸의 난이 보여주듯 인척의 힘이 세진 겁니다.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면 국력은 쇠하기 마련이지요. 급기야 18대 왕 의종 대는 무신의 난이 일어납니다. 18대 왕 의종 때의 무신 정중부에서 시작된 무신통치 기간은 24대 왕 원종 때까지 무려 130년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암흑기를 이어가게 되고 급기야 인류 역사상 최강 대제국인 원나라의 지배를 당하는 ‘부마국가’로서 나라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지요.

 그들이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국체를 유지시켜 준 것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원나라(몽골족) 역시 그들의 시조로 삼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동족에 대한 배려'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김운회 저. '대쥬신을 찾아서' p280)  몽골족의 원나라(몽골)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고려왕들은 ‘충○왕’으로 불렸습니다.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이 그들입니다.

 충혜왕은 재위기간이 6년 10개월입니다. 충혜왕은 성적으로 문란하여 아버지인 충숙왕조차도 그를 날건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충혜왕(忠惠王: (1315~1344년, 재위기간 : 1330년 2월 ~ 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 ~ 1344년 1월, 총 6년 10개월)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정(王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입니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28대 왕에 올랐지요. 이 때 그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걸로 판단됩니다. 게다가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습니다. 즉위 후 6일 동안이나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고 하며,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폐정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자 고려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시킵니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그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고 후사를 이을 현실적인 대안이 없자 1336년 12월에 고려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다시 왕위에 오릅니다.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며 날건달이라고 불렀으나 죽음에 임박하자 장남인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요. 하지만 고려 조정의 통보를 받은 원나라 승상 백안 등은 충혜왕이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합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충혜왕은 원 왕실의 책봉문을 받지 못했습니다.

 충혜왕은 왕위에 오르자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는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합니다. 친어머니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부인도 어머니가 분명한데 그것도 두 명 모두를 강간했다고 하니 정상적인 인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성적도착증(성적 도착증[ sexual perversion , 性的倒錯症 ])이 아닐까요?  전세계 역사서에서 보기 드문 기록입니다.

 자세한 내역은 이렇습니다. 술자리를 마련한 왕은 연회가 끝나자 술에 취한 척하고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이붓어머니 숙공휘령공주의 침실을 덮쳤는데, 이 때 공주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수하들을 시켜 양팔과 다리를 잡게 한 다음 입을 틀어막고 강간을 자행했다고 정사(正史)인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비 권씨 역시 그런 방법으로 강간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숙공휘령공주는 수치심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분에 이기지 못해 원 왕실에 충혜왕을 고발하려 하였는데요. 그래서 직접 원나라로 떠날 요량으로 수하를 시켜 말을 사들이게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충혜왕이 말시장을 열지 못하도록 하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원 왕실에 알려져 충혜왕 폐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맙니다. 또한 수비 권씨는 강간을 당한 뒤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이듬해 죽었는데, 아마 자살한 듯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에 대한 강간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시 유성의 처 인씨가 아름답다 하여 수하 구천우와 강윤충을 데리고 가서 유성에게 술을 먹이고 그 아내를 겁탈하였으며, 자신의 장인 홍탁의 후처 황씨와도 간음하였습니다. 그런데 충혜왕은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홍탁의 후처 황씨도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네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번 정리해볼까요? 서모를 두 명 강간하고 장모까지 강간했군요. 기가 막힙니다.

 

 

 

 충혜왕이 이 같은 패륜 행위를 벌이고 있을 때는 아직 원나라로부터 그의 복위가 승인된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중은 커녕 거의 매일같이 여자들에게 난삽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때 충숙왕이 어느 선비 가문의 며느리로 있던 남씨라는 여자를 강간하고 노영서라는 심복에게 주었는데, 충혜왕 역시 그녀를 강간하고 노영서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제가 볼 때 충혜왕은 강간의 전력이 있던 아버지 충숙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교육학자들은 아버지의 생활태도가 유아기. 청소년기의 아들의 두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곤 합니다.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은 사냥과 주색을 즐긴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들처럼 광적으로 난삽하진 않았던 걸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못된 점만 골라서 배웠군요.

 급기야 충혜왕의 패륜 행위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의주와 정주 고을 사람들은 나라가 소란하다며 짐을 꾸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해 11월에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합니다.

 두린 일행은 개경에 당도하자 숙공휘령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넸는데, 이 때 공주는 은밀히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하여 홍빈, 한첩목아불화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합니다. 고려가 항상 오랑캐라고 부르던 원나라 관리들, 그들도 기가 찼겠지요.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정권은 숙공휘령공주에게 넘어갑니다. 그녀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하도록 방조한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가두고 정동성의 관리들을 대폭 교체하였지요.

 한편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은 1340년 3월에 형부에 갇혔고, 이 때 김인, 김륜 등 왕의 측근들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그해 3월에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 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황후로 삼았는데, 그녀는 고려 출신 기철의 누이동생입니다. ‘고려의 딸이 원제국의 왕후가 되었다’는 역사적 술어는 이 장면을 의미하는군요.

 원나라에서 돌아온 충혜왕은 이전과 다름없이 음행을 일삼으며 또다시 정사를 어지럽혔습니다. 1341년에는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던 중에 그녀와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왕이 직접 두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대단하지요? 이 장면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듭니다. ‘과연 그 임금에 그 신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또 그해 11월에는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갔다가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으며, 그 며칠 뒤에는 자기가 때려죽인 박이라적의 처를 찾아가 역시 강간합니다.

 이외에도 충혜왕은 임홍보의 시비와 간음했으며, 재상 배전이 원나라 사신으로 가고 없는 사이에 배전의 처와 그의 동생 배금오의 처를 강간합니다. 또 만호전찬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고 귀양 보냅니다. 이렇게 되자 거리의 불량배 3명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부 공보의 처를 강간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강간사건만 해도 이와 같은데 기록되지 않은 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나라 기황후의 초상화

 

 

 

 충혜왕의 행동은 단순히 이처럼 음탕한 행위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사냥과 수박회를 즐기는가 하면, 민가의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는 바람에 원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1343년 3월의 어느 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횃불이 옮겨 붙어 누각을 태운 일이 있고, 그 다음 날에는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1백여 채를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개경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경 사람들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이 유포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대궐의 주춧돌 밑에 파묻으려 한다고 하였기에 집집마다 놀라 어린아이들을 안고 도망치는 자가 있었으며, 못된 소년들이 이 틈을 타서 마음대로 강탈하고 절취하였다.”

 이 기록에서처럼 충혜왕은 새로운 궁궐을 짓기로 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여 민생을 어지럽게 하지요. 그는 직접 공사장 담장에 올라가 감독을 하였으며,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둬들여 단청을 하였는데, 이 때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데 기한을 늦추면 그 벌로 몇 곱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하였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충혜왕의 학정이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한 현효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시킬 것을 건의합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충혜왕은 1343년 10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신축한 신궁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그의 신궁생활은 채 한 달도 가지 못했습니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기 때문이죠.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과 대사령을 반포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댔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고려 후기 원(元)에 의해 일본 원정을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되었던 관서)으로 나갑니다. 이 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합니다. 이 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있던 좌우사 낭장 김영후, 만호 강호례, 밀직부사 최안우,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았으며, 지평 노준경과 용사 2명이 피살되었다고 <고려사>는 전하지요.

 

 

 

 타적이 충혜왕을 포박하여 말에 태워 원나라로 달려가자 충혜왕은 천천히 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타적은 칼을 빼들고 위협하며 그를 급히 압송하였다지요.

 충혜왕이 압송된 뒤 기철, 홍빈, 채하중 등이 정사를 처결하며 은천옹주를 비롯한 충혜왕의 애첩 및 궁인 126명을 궁궐에서 추방합니다.

 이 때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원나라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게양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서 2만여 리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충혜왕은 이곳을 향해 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백성들 중에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기뻐서 날뛰며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합니다.

 

 여기까지가 충혜왕의 재임기간 일어났던 주요사항들입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유독 고려시대에서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이상한 군주들이 많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태조 왕건은 왕권강화를 위해 29명의 부인과 결혼하였고 34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왕통을 잇기 위해 사촌간 결혼은 물론이요,  오누이간 결혼. 삼촌과 조카 사이의 결혼도 다반사로 진행했습니다. 현대의학은 근친간의 동종교배로 인한 기형아 발생 가능성을 경고합니다. 그런 혈통이 누적되어 태어난 충혜왕은 기형아, 즉 정신적인 이상을 가진 기형아가 아니었을까요? 

 고려 말기 왕들의 실정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이어져 나라가 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판단하시겠지만 우리역사상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은 '새발의 피'이지요. 전 세계 역사상 이런 군주가 있을까요?  후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군주입니다. 참고로 이 글은 박영규가 쓴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과 도현신이 쓴 <한국사 악인열전>을 참고로 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