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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견우직녀(牽牛織女) 설화

by 언덕에서 2012. 8. 26.

 

 

 

 

 

견우직녀(牽牛織女) 설화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견우와 직녀

 

 

견우직녀설화는 예로부터 동양권에서 무수히 많은 문인들의 시문의 주제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이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칠석우>, 이제현(李齊賢)의 <칠석>, 이곡(李穀)의 <칠석소작(七夕小酌)>, 조선시대 정철(鄭澈)의 <차광한루운(次廣寒樓韻)>,김정희의 <칠석칠률(七夕七律)>, 여류시인들의 것으로 이옥봉(李玉峯)의 <칠석가>, 삼의당(三宜堂)의 <칠월칠석>, 운초(雲楚)의 <강루칠석(江樓七夕)>, 정일헌(貞一軒)의 <칠석>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고전소설, <규원가(閨怨歌)><해조가(諧嘲歌)><과부가><농가월령가><화조가><사미인곡>과 같은 가사, 또는 시조ㆍ민요들에도 견우직녀설화가 주제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이 설화는 칠월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로 평가된다.

 견우와 직녀’는 유독 중국과 한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이다. 유목국가인 몽골, 유라시아 실크로드 통로인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설화는 농경민의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를 치는 남성과 베를 짜는 여성의 역할 분담은 바로 그러한 농경 생활을 배경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은하(銀河)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견우성과 직녀성의 준말. 음력 7월 7일, 즉 칠석(七夕)날과 관련된 설화로 더 유명하다.

 견우성과 직녀성은 서로 사랑하지만, 은하에 다리가 없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 회포를 풀 방법이 없다. 견우와 직녀의 이 딱한 사정을 알고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지상에 있는 까마귀와 까치가 하늘로 올라가 몸을 잇대어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준다.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하는데, 견우와 직녀는 오작교를 건너와 1년만의 회포를 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풀기도 전에, 새벽닭이 울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녀는 또다시 1년간 베를 짜고 견우는 밭을 갈면서 제각기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

 그러기에 칠석날에는 까마귀ㆍ까치를 한 마리도 볼 수 없다 하는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서 오작교를 놓는 데 참여하지 못한 까마귀나 까치들뿐이라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눈물이라 전한다.

 지상의 주인공들은 대개 천상의 인물들과 일정한 관련을 맺을 때 설화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동물인 소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것도 천상적인 것을 그 안에 투영시킨 결과이다. 소는 대개의 경우 천상으로 향하는 길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즉 그것은 ‘도(道)’의 상징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소의 안내로 인해 견우는 직녀를 만나고, 나중에는 그녀가 있는 천상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원래 직녀는 하느님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하느님이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에 사는 목동 견우(牽牛)와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러졌으므로 하느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 해에 한 번 칠월칠석날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烏鵲橋)'라 하며,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또한, 이 날 오는 비는 '칠석우(七夕雨)'라 하여,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견우와 직녀가 한 해에 한 번 만나게 된다는 칠월칠석의 유래설화는 다소 비극적이다. 시기적으로 매년 칠월칠석이 되면, 두 별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화가 생겨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설화의 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후한(後漢) 때에 만들어진 효당산(孝堂山)의 석실 속에 있는 화상석(怜像石: 장식으로 신선, 새, 짐승 따위를 새긴 돌)의 삼족오도(三足烏圖)에 직녀성과 견우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한(前漢)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 설화의 가장 오래된 예는 진(晉)나라 종름(宗侖)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408년(광개토왕 18)에 축조된 대안 덕흥리(大安德興里: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고구려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앞에는 견우, 뒤에는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 공민왕조에 왕이 몽고인 왕후와 더불어 안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낸 기사가 처음 보인다. 이 설화는 신앙과 함께 우리나라 전국에 전승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