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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대금황제(大金皇帝)를 꿈꾸었던 조선 무장 이징옥

by 언덕에서 2012. 8. 25.

 

 

 

 

 

대금황제(大金皇帝)를 꿈꾸었던 조선 무장 이징옥(李澄玉 : 미상∼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무장. 본관은 양산(양산), 지중추원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이며, 이징석(李澄石)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무용이 뛰어나, 어머니를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끌고 오고, 호랑이를 호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 부사직으로 별시에 응하여 무과친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다.

 1423년(세종 5) 황상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구(侵寇)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큰 공을 세우자, 세종이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영북진절제사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 만에 그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하여 우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한다. 그는 동북변경의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 배치되어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으나, 1435년을 고비로 4진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대 여진 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졌는데, 마침 1438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 함경도를 떠났다.  그 뒤 100일 만에 다시 경상도·평안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여진족들이 두려워했으며, 동북면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유명했다.

 

 

 1449년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문종 즉위) 함길도도절제사로 부임,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으로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 당하자, 후임자인 박호문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러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 이행검 등의 습격을 받아 그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난은 1402년 11월의 조사의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 후일 '이시애 난'의 선구가 되었다.

 

이징옥은 김종서와 함께 북방 6진을 개척하여 오늘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여진족과의 수십 차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장군이었다. 한명회의 계책을 따른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비롯한 충신을 죽이고 어린 조카를 겁박하려 듦에 따라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의 칼은 북쪽을 향해 있었다. 조선에 실망한 그는 대륙을 건너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대금제국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륙을 향해나아가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그는 끝내 두만강을 건너지 못했다. 특히, 사대사상에 젖었던 당시의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말했다. " 이징옥 장군이 죽은 후 그 만주 땅의 지리 통달은 대가 끊어졌다. 아무도 이징옥 장군처럼 만주로 부지런히 다니며 적정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만주 땅을 내왕하며 그 사정을 미리 잘 알았다면 여진족의 흥기를 막아 후일의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고조선과 고구려.발해가 지켰던 만주 땅은 우리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