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이병주 장편 소설『관부연락선』

by 언덕에서 2012. 9. 6.

 

이병주 장편소설 『관부연락선』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장편소설로 1968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월간중앙]에 연재되었다. '관부연락선'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시까지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 사이를 운항하던 연락선을 의미하며,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라고 부른다. 1905년 9월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에 의해 개설되어 한국의 경부철도(京釜鐵道)와 일본의 도카이도[東海道]·산요·규슈[九州] 철도 간에 여객· 수하물·속달취급화물의 연대운수를 개시하였다. 처음으로 취항한 것은 1680t급의 이키마루[壹岐丸]로 1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그 뒤 7000t급의 곤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과 3000t급의 도쿠주마루[德壽丸]·쇼케이마루[昌慶丸] 등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취항하였으며, 운항 소요시간도 7시간 30분으로 단축되었다. 현재는 부관페리가 취항하여 한일 간의 중요한 해상교통로가 되고 있다.

 장편소설 『관부연락선』은 위의 관부연락선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1940년 초부터 한국전쟁까지를 시간적인 배경으로 하는 좌. 우 이데올로기를 다루었다. 주인공 유태림의 후배이자 친구인 이형식이, 진주를 중심으로 조선과 일본을 교차시키면서, 유태림의 수기와 자신의 회상을 섞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단적으로 표현해서 해방 전후 경남지방 좌익지식층들의 활동상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부산항 1부두에 정박한 관부연락선의 모습. 선박 뒷편에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태림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대학생이다. 그는 학병으로 가기 전에, 일본인 E와 원주신(元周臣)이란 사람을 조사하는 과정을 ‘관부연락선’이라는 수기로 적어 둔다. 그러던 중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서 일본 병사 노릇을 하다가 광복을 맞아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이형식의 소개로 좌익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C(경남 진주로 추정) 고장의 중학교 교사가 된다. 좌와 우의 불화와 투쟁이 본격화되자 그는 그곳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하면서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러나 시대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질 뿐이다. 유학생의 낭만은 이내 전화에 휩쓸린다. 태평양전쟁 말기 유태림은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으로 끌려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국선에 올랐지만 그가 도착한 조국은 전쟁이 임박한 극심한 이념대립의 공간이었다. 고향에서 교편을 잡은 유태림은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 청년 학생을 이끄는 한편 분단의 모순을 성찰하며 나라 만들기를 위한 사상논쟁에서도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고향의 청년을 지켜내는 지사의 풍모를 잃지 않은 그였지만, 끝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좌우 쌍방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다가 종국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부대에 강제 납치되어 행방불명됨으로써 실종자가 되고 만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다가 그는 이 같은 처지를, 자신의 수기를 통해 “‘운명. 운명…… 그 이름 아래서 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써, 역사적 운명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말로는, 한 젊은이의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휩쓸려간 당대 인텔리들의 비극적인 모습의 일단을 보여준다.

 

 

소설가, 언론인 이병주(李炳注.1921-1992)

 

 나림 이병주(1921 ~ 1992)는 44세의 나이로 뒤늦게 문단에 나왔지만 그 뒤로 1백 권이 넘는 책을 펴낸 한국문단의 가장 정력적인 ‘직업작가’로 손꼽혀 왔다. 그는 해방 전. 후사에 정통해서 이를 소재로 한 이데올로기 성향이 짙은 작품을 썼다.

 그는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통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성을 묘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특히 그는 짙은 농도의 화려한 문체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다양한 체험을 녹여냄으로써 일반대중은 물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인기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본 명치대 문예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불문과를 중퇴한 그는 진주농대와 해인대 교수를 거쳤고 1955년부터 부산 [국제신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문단 데뷔작은 1965년 [세대]지에 발표한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인데 이 작품은 곧 그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 작품들로는 장편 『관부연락선』, <산하>, <지리산> 등이 있으며, 한국전쟁을 다룬 중편 <예낭풍물지>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스스로 꼽기도 했다. 타계 직전에는 <소설 제5공화국>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지리산>은 일제말기부터 해방, 6ㆍ25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를 배경으로 역사의 그늘에 묻혀 버렸던 빨치산 등 비극의 주인공들을 소설 속에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으나, 문단 일각에서는 그의 보수적 시각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술과 풍류를 즐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보다 인간적인 것, 인간의 안에 있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와 정치 비판, 이념, 역사 등을 소재로 광범위한 대중을 사로잡는 작가로 관심을 끌어왔다.

 

 

 이 소설은 관부연락선이란 상징물을 통해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던 조선 민중의 아픔과 광복 전후의 민족적 시련을 그린 역작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는 물론이요 광복 이후에도 중도적 입장을 지니고 있던 한 휴머니스트 지식인이, 좌익과 우익, 그리고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시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관부연락선』은 동경 유학생 시절에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에 대한 조사를 벌이면서 직접 작성한 기록과, 해방공간에서 교사생활을 함께 한 해설자 이 선생이 유태림의 삶을 관찰한 기록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기록이 교차하며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장이 이선생인 ‘나’의 기록이면 다음 장은 유태림인 ‘나’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유태림의 조사를 통해 관부연락선의 상징적 의미는 물론 중세 이래 한일 양국의 관계가 드러나기도 하고, 이선생의 회고를 통해 유태림의 가계와 고향에서의 교직생활을 포함하여 만주에서 학병생활을 하던 지점에까지 관찰이 확장되기도 한다.

 작가가 시종일관 이 소설을 통해 추구한 중심적인 메시지는, 그 자신이 소설의 본문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당시의 답답한 정세 속에서 가능한 한 양심적이며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 진지한 한국청년의 모습”이다. 능력과 의욕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 하기로는 유태림이나 우익의 이광열, 좌익의 박창학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의 좌우익 갈등 속에서도 교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으며,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으며, 좌우익 양쪽 모두의 권력에서 적대시될 때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겠는가를 작가가 질문하는 셈인데, 거기에 이론 없이 적절한 답변은 주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작가는 다만 이를 당대 젊은 지식인들의 비극적인 삶의 마감-유태림의 실종 및 다른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제시할 뿐이다.

“중학교 역사책에 보면 의병을 기록한 부분은 두세 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두세 줄의 행간에 수만 명의 고통과 임리한 피가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너무도 많은 유태림이 있으며 그들의 아픔과 비극이 오늘날 우리 삶의 뿌리에 맞닿아 있다. 이 명료한 사실을 구체적 실상으로 확인하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이 작가의 공로이다. 그것은 또한 이미 30여 년 전에 소설의 얼굴로 등장한 이 역사적 격랑의 기록을, 오늘날 우리가 다시 찾아 읽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관부연락선 :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를 운항하는 연락선. 광복 전에는 관부(關釜) 연락선이라 불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북지방(東北地方: 滿洲)ㆍ몽골(蒙古)ㆍ중국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이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神戶) 사이의 산요선, 고베와 동경(東京) 사이의 도카이도선(東海道線) 등 일본의 철도와 연결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부선ㆍ경의선 그리고 만주의 안봉선(安奉線)ㆍ남만주철도ㆍ시베리아철도 등과 연결되어 광복 전에는 세계일주 여행로의 일부를 이루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 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들의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겨야 하였다. 최초로 취항한 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t)라는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 뒤 3,000t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ㆍ도쿠주마루(德壽丸)ㆍ쇼토쿠마루(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만주·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인 7,000t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고안마루(興安丸) 등을 운항하였으며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징발하고, 전선과 일본 본토를 운항하는 데 투입되었으나, 미군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관부연락선은 두절되었으며, 그 뒤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오가지 못하였다.

 광복 후에 일본까지 다니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첫 여객선은 아리랑호로 1964년 1월 부산항 제2부두를 떠나 처음으로 일본으로 갔다. 1970년 6월 17일부터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까지 이틀에 한 번씩 오가는 부관페리호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는 한국과 외국을 연결하는 유일한 여객전용 연락선으로 일본지역 관광객 수송에 큰 몫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