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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윤흥길 중편소설『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by 언덕에서 2012. 6. 26.

 

 

윤흥길 중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윤흥길(尹興吉.1942 ~)의 중편소설로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작이다. 도시 빈민의 소요 사건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와,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 하나에만 매달린 채 무능력자의 길을 걸어가는 한 소시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어떠한 개인의 문제도 사회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또한 한국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깨닫게 해 주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광주대단지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에서 1971년에 일어난 일로 지금까지도 ‘난동’이나 ‘폭동’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대규모 소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소설 속에서 권씨의 말을 통해 그 일단이 이야기되는데, 서울의 청계천 등의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을 정부가 강제 철거한 뒤 생계수단도 마련되지 않은 광주대단지(경기도 광주 동부면, 지금의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일대)로 강제 이주한 것이 발단이 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의 행정당국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주민의견 수렴도 없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광주 대단지 건설을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작품 속 주인공인 권씨의 말을 빌리면 보름 안에 집을 지으라고 하고, 억지로 집을 지어 놓으니 지가를 마음대로 대폭 올린 뒤 일시불로 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도에서는 토지취득세부과 통지서까지 발부하였다. 그리하여 이주민들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

 

 

<광주대단지 사건> 관련 당시 기사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0평짜리 주택에 세 들어 사는 동안, 우리 부부는 가난한 이웃들이 보여 준 우리 '선생 댁'에 대한 동경과 지나친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 몇 푼 안 되는 과자 부스러기로 가난한 애들에게 못된 일을 시키는 아들의 비뚤어진 행동이 무리하게 성남의 고급 주택가에 집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정상의 무리를 다소나마 메워 볼 생각으로 방을 하나 세놓게 되었는데, 권씨 가족이 이사를 왔다. 그것도 전세금 20만원 중 10만원은 아예 내지도 않았고, 게다가 두 명의 자식 외에 뱃속에 또 한 명이 자라고 있었다. 출판사에 다니던 권씨는 집 장만을 해 볼 생각에 철거민 입주권을 얻어 광주 대단지에 20평을 분양 받았으나, 땅값, 세금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권씨가 이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징역을 살다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신의 구두만은 소중하고 깨끗하게 닦는 버릇이 있다. 얼마 후 권씨 아내가 애를 순산하지 못해 수술을 받을 처지가 되었다. 권씨가 '나'에게 수술비용을 빌려 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나'는 그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의 이중성을 느낀 '나'는 권씨 아내가 수술을 잘 받도록 해 주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권씨는 그날 밤 '나'의 집에 강도로 침입했다. '나'는 그가 권씨임을 알아차렸고 되도록 그를 안심시키는 쪽으로 행동했으나 정체가 탄로 난 권씨는 "그 따위 이웃은 없다는 걸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 하면서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광주 대단지 천막촌의 모습(성남 철거민 정착지 전경)

 

 집주인의 도움으로 그의 아내는 무사히 출산했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입원비 마련을 위해 그 집에서 서투른 강도행위를 하고 그날 이후 행방불명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만 자존심은 강한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는 늘 반짝이는 열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두는 스스로의 인간적 위엄을 지켜나가려는 자긍심의 상징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현실에서 철저히 패배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위신과 체면을 잃어버리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의 좌절을 형상화함으로써 그와 같은 인물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오 선생과 권씨를 대립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윤흥길의 자기 체험적인 내용이며, 실제의 사실과 함께 당시 시대적 환경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우선 윤흥길 자신은 오랜 실직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또한 셋방살이의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선생이었고, 당시 선생이라면 사람들은 큰 호기심을 가지고 주시하였다. 이 소설에서는 선생으로서 받는 이웃의 호기심 어린 추적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경기도 광주 지구의 토지 문제는, 실제의 사실과 결부되어 철거민 혹은 빈민들의 눈물이 고여 있다. 권씨의 투쟁위원 내지 데모의 현장을 그의 소설 <궁상 반생>에서는 4·19혁명, 자유당 붕괴에 따른 데모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권씨 아내 뱃속의 태아가, 탯줄에 목이 감겨 수술을 필요로 했던 것 또한, 윤흥길 자신과 아내가 겪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이었다.

 

 

 가장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권씨의 자존심과 대학 출신이라는 오기,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비아냥거리듯 묻는 오 선생 앞에서의 깐깐함 등은, 모두가 윤흥길 자신의 오랜 방황과 심적 실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우리는 근대화에 앞선 뼈아픈 현실과 정치적 부패에 항거하는 소시민의 진실, 한국인 특유의 오기, 깡다구, 자존심 등을 그 문학사적 가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로써 한국인의 생활사, 혹은 그 정신사를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인 국민학교 오선생은 소외된 하층민의 삶을 외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의식의 분열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러한 중간층의 계급적 속성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두의 상징 및 암시적 기법과 현실 묘사의 사실주의 리얼리즘을 융합한 작품으로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늘에서 소외된 계층의 삶과 소시민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광주대단지 사건 :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빈민층이 도시화과정에서 파생하는 소외와 개발의 구조적 모순에 반대하여 일으킨 사건. 8.10 광주 대단지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971년 8월 10일 발발되었다. 서울시는 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파생된 철거민 대책으로 이주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군(지금의 성남시) 중부면 일부가 광주대단지로 지정되었고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땅을 분양하였다. '선 입주 후 건설' 이라는 미명하에 상하수도 건설도 이루어지지 않은 천막촌이지만 살 곳을 찾아 헤매던 빈민층의 유입은 급증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에서는 분양권 전매 금지와 함께 높은 가격의 토지대금 일시 상환 조치를 발표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광주대단지 불하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라는 유례없이 긴 이름의 조직이 결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