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기록서 『간양록>(看羊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던 강항(姜沆.1567~1618)의 기록을 모은 책이다. 원래 저자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지금의 것으로 고쳤다.
‘간양’이란 흉노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에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위의 시는 신봉승 작사, 조용필 작곡, 조용필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 ‘간양록’으로, 조용필 2집 앨범에 실려 있다. 사극을 많이 쓴 극작가로서 역사에 조예가 깊은 신봉승 씨는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겪으며 보고 들은 일을 귀국하여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에 실린 시를 바탕으로 이 노랫말을 썼다. 일본에서 포로상태였던 강항은 전라 좌병영 우후(虞候)로서 싸우다가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 온 이엽(李曄)이 탈출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엽이 쓴 시를 강항이 전해 듣고 <간양록>에 기록한 것을 참조했던 것이다.
다음은 그 일부다.
‘어버이는 밤 지팡이 잃고 새벽달에 울부짖으며…지켜 오던 조상 묘지에는 풀 반드시 거칠었으리.’
<간양록>에서 ‘간양’(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양을 돌본다’는 뜻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항 자신이 붙인 본래의 책제목은 <건차록>(巾車錄)이었다. ‘건차(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강항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54년에 그의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소무에 견주어 제목을 <간양록>으로 바꿨다. 강항이 <간양록>에 수록한 시 중에도 자신을 소무의 처지에 빗대는 대목이 몇 곳 나온다.
강항(姜沆.1567.명종 22~1618.광해군 10)은 조선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또는 사숙재(私淑齋)이다. 본관은 진주로 사숙재(私淑齋) 희맹(希孟)의 5대손이다. 그는 1593년(선조 26) 문과에 급제, 박사ㆍ전부(典簿)를 거쳐 공ㆍ형조 좌랑(佐郞)으로 있었다.
정유년(1597년)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다가 정유재란으로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의 종사관으로 있게 되었고, 남원에서 패하자, 영광에 이르러 의병을 소집하였으나, 왜병이 그 지방으로 육박해 온다는 소문에 오합지졸인 부하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는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이순신(李舜臣)에게 합류하려다가 오히려 적선을 만나 형제자매가 모두 물에 뛰어들었다가, 왜군에게 잡혀 일본에 압송되었다. 포로가 된 그는 이요(伊豫)로부터 오사카(大阪)에까지 이르렀다가 1600년(선조 33)에 석방, 귀국하였다.
후시미성(伏見城)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곳의 여지관호(輿地官號) 및 형세를 적어 인편에 서울로 보내니, 선조는 만족히 여겨 이를 비국(備局)에 보존케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귀국한 뒤 스스로 죄인이라 하고 고향에 파묻혀 일생을 마쳤다. 일찍부터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고, 문하에 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하였다.
<간양록>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의 글을 모은 책이다. 현존하는 판본은 81장 1책으로 된 필사본과 ≪수은집≫에 1책으로 포함되어 있는 목판본이 있다. 내용은 적지에서 일본의 정세를 임금님께 올린 <적중봉소 賊中封疏>, 당시 일본의 관직․지도․장수들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적중견문록 賊中見聞錄>, 귀환할 당시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문인 <고부인격 告俘人檄>, 귀국 후 조정에 올린 계사인 <예승정원계사 詣承政院啓辭>, 그리고 적중에서 피로생활의 자초지종을 기록한 <섭란사적 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간양록의 가치는 히데요시의 사망과 그 이후 정세에 대한 판단부분에서 강항의 예측이 틀림없었다는 점이 후대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으로 왜국에 체류하였지만 유학자이자 전직 관료였다는 점은 강항이 적국에서 적국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는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런 위치에서 왜국의 지리와 문화 나아가서 정치를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이 있었기에 이 책의 가치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 자신으로 눈으로 많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하찮은 오랑캐로만 치부했던 왜가 어찌 보면 자신의 조국 조선보다 더 발달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귀국 후 조정에 올리는 상소에서 왜국의 현 주소를 사실 그대로 보고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방법을 몇 가지 제시하기도 하였다. 타국과의 통상방법이나 당파를 초월한 우수한 장군들의 기용 및 군인들의 자립위한 토지경작 문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이 때 강항의 정책을 받아들였다면 양대 호란은 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아가 일제의 강점 같은 국치 또한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포로 신분으로 적국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강항은 조선의 선비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본 성리학의 단초를 여는데 기여하였고 그 자신 역시 일본을 철저히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기록에서 보면 당신 일본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막부를 연 인물들의 세세한 평가나 일본의 직제 및 성의 축성방법 그리고 백성들의 사고 등 마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적지에서 목숨을 담보로 이러한 기록을 조선을 보내는 등 비록 창, 칼을 직접 손에 들고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현대식 전투로 표현하면 정보전의 대가다운 행동을 했다고 봐야 한다. 기록이란 대부분의 경우 후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더욱이 시간이 흘러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을 경우에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강항의 간양록은 당시 소중화라는 역시에 사로 잡혀있던 조선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대단한 기록이다. 당시에는 군주나 정책입안자들에게 등한시되었지만 불과 100년 이내에 조선이 다시 전쟁의 한가운데 서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7년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징비록>이나 <난중일기> 등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도화선이 된 왜국의 실상에 대한 기록은 강항의 <간양록>이 유일하다.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여기서 임은 임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란에 시달렸던 조국의 민초들을 의미함일 것이다. 나라 사랑의 마음 가득했던 조상님의 저서는 옷깃을 다시 여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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