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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길 위의 인간'이라는 숙명과 이병률의『끌림』

by 언덕에서 2012. 5. 16.

 

 

 

 

'길 위의 인간'이라는 숙명과 이병률의『끌림

 

 

 

 

지난여름,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사받았다. 꽤 유명한 시인이 쓴 에세이집이었는데 내용의 태반이 사진이었던지라 불과 한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저자가 아시아 대륙은 물론이고 유럽, 미주 등을 여행하며 써내려간 여행의 기록으로 그런대로 읽을 만 했지만 타인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보내준 지인에게 메일을 보냈다. “먹고사는 걱정 없이 여행만 하고 살다니 세상에는 팔자 좋은 사람들도 많군요…….”책은 책장 구석에 처박히었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 비 오는 휴일, 책장에서 그 책을 다시 발견했다. 갑자기 그가 이 책을 보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매우 진지하게 읽었다. 두 번째 읽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을 새로이 알 수 있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인은 ‘길 위의 인간’이라는 우리 삶의 숙명을 내게 알려주려 했던 의도가 아니었을까 뒤늦은 생각을 해본다.

 만난 적이 없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안부가 궁금하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쾌차를 기원드린다.

 

 

 


 이 책은 시인이자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구성작가 이병률이 50여개국, 200여 도시를 돌며 남긴 순간순간의 숨구멍 같은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다. 2005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기존의 정보전달 위주의 여행서들이 갖지 못한 감성을 전달하며 이슈가 되었다. 이후, 그 세월의 흔적들을 노트 중간 중간 끼워 넣어, 덧입혀진 기억과 시간들, 그리고 인연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행에세이집이라기보다는 ‘인연에 관한 기억’을 적은 문집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저자는 모든 여행의 시작이 그러하듯 뚜렷한 목적 없이 계산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주저앉았다 내처 길 위에 머무는 동안 마흔이 넘는 나이가 됐다고 썼다. 성숙의 이름을 달고 미성숙을 달래야 하는 청년의 목마름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여행이었고, 그에게 여행은 또다시 떠나기 위해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끊을 수 없는 제 생의 뫼비우스 같은 탯줄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운명, 달리 말하자면 이 짓을 이리 할 수밖에 없는 나아가 숙명, 그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고 한다.

 

 

 


 이병률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내려가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실수처럼 그 길로 접어들었다고 고백한다. 스무 살, 카메라의 묘한 생김새에 끌려 중고카메라를 샀고 그 후로 간혹 사진적인 삶을 살고 잇다.

 그는 사람 속에 있는 것, 그 사람의 냄새를 참지 못하여 자주 먼 길을 떠나며 오래지 않아 돌아와 사람 속에 있다. 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존재하므로 달라지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바라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으며 정상적이지 못한 기분에 수문을 열어줘야 할 땐 속도, 초콜릿, 이어폰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하나 간혹 당신에게 일방적이기도 하다.

 그는 전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사물에 죽도록 약하며 한번 몸속에 들어온 지방이 빠져나가지 않는 체질로 인해 자주 굶으며 또한 폭식한다. 술 마시지 않는 사람과는 친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 부분, 나와 흡사하다)

 

 

 


 이 책의 특징은 기존의 정보전달 위주의 여행서들이 갖지 못한 감성을 전달하고 있는 부분이다.  『끌림』은 여행과 사랑, 낭만에 목마른 이들의 찬가가 되었고, 여행 에세이가 하나의 확고한 장르로 자리 잡은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덧입혀진 기억과 시간들, 그리고 인연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움, 사람에 대한 호기심, 쓸쓸함, 기다림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다니고 쉼 없이 끄적이고 찍어야 했던 열정이 고스란히 나열되어 있다. 이 책 『끌림』은 각 페이지의 감성을 호흡하는 시집과 같은 책이다. 목차도 페이지도 없으니 당연히 순서도 없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하듯 이 책은 그냥 아무 곳이나 펼쳐보면 그곳이 시작이기도, 거기가 끝이기도 하다. 그러다 울림이 깊은 나를 끌어당기는 사진과 글에 빠져들면 된다. 그곳이 여행지이고, 그곳이 길 위다.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허허로울 때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아래 신경숙의 서평으로 포스팅을 갈무리한다.



 병률은 나그네 같다. 늘 어디론가 가고 있다. 놀라운 건 그런 병률이 일상에서는 누구와 견줄 바 없이 지극히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길 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때가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여행자 병률과 함께 2년쯤 한 동네에 같이 살았다. 그가 빈번하게 카메라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났으므로 나는 그가 비워두고 간 빈집 식물에 물을 주러 갔다. 두 달 만에 혹은 보름 만에 병률이 돌아와 보여줬던 사진과 들려준 이야기들이 이 책이 되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곧 떠날 계획을 세웠던 그 마음의 일부도 여기 한데 담겨 있으리라. 나 같은 정주자들에겐 닫힌 문을 밀어볼 때와 같이 설레고 반가운 일이다.

 - 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