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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여성 탈북 작가의 데뷔작 『청춘연가』

by 언덕에서 2012. 5. 9.

 

 

여성 탈북 작가의 데뷔작 『청춘연가

 

 

 

 

 

이 책은 우리 사회에 함께 하지만, 목소리 없는 존재로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정면에 드러낸 보기 드문 소설이다. 세계에서 가장 특수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은 북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기록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희망과 열정에 대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저자 김유경(가명)은 2000년대에 탈북하여 한국으로 왔다. 낯선 생활에 쫓기고, 적응하느라 힘든 와중에도 남한 작가들의 작품을 밤새워 읽고, 매일 2~3시간씩 노동하듯이 끊임없이 작품을 써왔다고 한다.

 북의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북한에서 정식 활동을 하던 작가가 남한에 들어와서 창작소설을 발표한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이다. 여성 작가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탈북자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고, 따라서 불쌍하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소설은 신문기사에서 정형화되어 있던 탈북자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캐릭터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진짜 얼굴을 찾아준다. 예들 들어 탈북자 중에는 공안에 적발당할까 숨어 지내다가 중국인에게 인신매매를 당해 갖은 고생을 다하다 탈출한 경우도 있고, 브로커에게 많은 돈을 뿌려가며 비교적 편하게 탈북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은 같은 탈북자라도 서로 다른 두 그룹이 반목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3월 한 방송에서 배우 차인표는 탈북자 강제북송반대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울음은 다 암흑으로 빠져 아무도 들을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대신 울어줘야 했다는 것이다.

 장편소설 《청춘연가》를 발표한 김유경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문학이 오로지 체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곳에서 세상 밖으로는 아무 소통도 되지 않는 글만 써온 그에게 새로운 환경에서의 글쓰기는 분명 두려운 일이었겠지만 그는 그저 넋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공중전화 앞에는 아직도 여자들이 전화통에 매달려 야단법석이다. 귀에 익기도 하고 설기도 한 중국말이 간간이 들려온다. 모두 중국에서 맺어진 인연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지만 그 여자들의 과거 인연들은 날마다 그녀들과 동거하고 있다. 중국에 두고 온 아이들 사진을 품고 있는 여자들도 많다. 그리고 매일 전화를 건다. 천천히 지나치며 유심히 보니 어떤 이들은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환성을 지르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새로운 곳에 왔지만 그녀들 역시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모든 연들이 줄레줄레 중국을 거쳐 북한까지 아득히 뻗어 있다. ---p.12

 

 

 

 

 

 

 이 책《청춘연가》는 우리 사회에 함께 하지만, 목소리 없는 존재로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정면에 드러낸 희귀한 작품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희망과 열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경옥이 새로 들어간 노래빠는 꽤 크고 손님이 많았다. 노래빠 주인은 쉰이 조금 넘은 아줌마인데 경옥이 손님을 잘 다룬다고 좋아한다. 경옥은 그동안 정말 열심히 손님들을 치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3차는 나가지 않았다. 손님들이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경옥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토록 자부심을 안겨줄 줄은 몰랐다. 설사 언니들한테 들통 난다 해도 자기는 당당하다. 손님들하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적당한 스킨십을 좀 받아준 대신 돈을 많이 받지 않는가.---p.208

 

 작품에서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모두 도망치는 데 쏟아 부어야 했던 북쪽의 청춘들이 등장한다. 북한, 중국, 하나원, 한국 등을 배경으로, 잊혀질 뻔한 그들의 사연 많은 이야기이다.

 

 

 

 

 

 작품은 정형화되어 있던 탈북자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캐릭터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진짜 얼굴을 찾아준다.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는 과정도 다양하게 그려진다. 조그만 회사에 취업하여 고군분투를 하는 삶, 노래방 도우미로 살아가는 삶,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삶과 자신의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 삶, 사기를 당하는 삶과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삶 등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가까이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늘 저녁 뉴스에서는 중국 공안이 숨어 사는 탈북자들을 색출해서 북송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선화네 방 여자들은 모두 흥분하여 욕을 내뱉는다. 이들 중에도 적지 않은 여자들이 북송 당한 경험이 있다.국경 다리 선을 넘어서문 우린 사람도 아니요. 에구 그 개새끼들을 난 죽어도 잊지 못할 기요. 글쎄 그 보안원 새끼들은 우리가 다리를 넘어서자마자 개간나 쇠간나 하면서 발길질을 하고…….” 무산 여자 신영애는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듯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한마을에 시집온 다른 북한 여자가 잡히면서 탈북자들이 줄줄이 공안에 잡혔다고 한다.  일주일 만에 신영애는 국경 지역 투먼 파출소로 이송되었다. 파출소에서는 이미 여러 명의 탈북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컴컴하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훔쳐보며 그녀들은 숨죽인 울음을 울었다. 이미 붙잡혀 갔던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또다시 당할 매질과 굶주림, 강도 높은 노동을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고 처음으로 잡혀 온 여자들은 공포에 가슴을 졸였다.---p.78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고통과 이념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꽃 같은 시절을 회복하려 애쓴다. 북에서 온 이들이라고 왜 청춘의 떨림과 사랑에 대한 설렘이 없었을까. 도망치느라 그 시절을 모두 빼앗겨버린 그들이 미처 꽃피우지 못했던 청춘의 연가를 되찾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청춘연가》의 첫 장면은 남도 북도 아닌 하나원에서 시작한다. 어렵게 탈북에 성공하여 제3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이 정거장 같은 공간에서 이들은 평생 서로 의지하게 될 친구들을 만난다. 주인공인 선화를 비롯한 탈북자 여성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이들의 삶이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결코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선화는 결코 자기 삶의 구원을 피가 섞인 가족이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멋진 남자에게 기대지 않는다. 희망은 복녀와 경옥 등 함께 하나원 생활을 한 여성들과의 우정에서 비롯된다.

 

 선화는 일할 때도 좋지만 출퇴근할 때가 제일 좋았다. 붐비는 지하철역을 오갈 때나 버스를 타고 다닐 때면 말할 수 없이 흐뭇했다. 아침이면 제각기 바삐 서두르며 일터로 가는 사람들 속에 자기도 속해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했다.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 속에 끼면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여 좋았다. 그들과 같이 자기에게도 일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어디에선가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환희로웠다. 스스로도 무시하고 멸시했던 자신이 결코 쓰레기처럼 버려질 존재가 아닌 것에 감격했다. 그렇게 선화는 출퇴근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새삼 확인하며 행복해했다.---p.124

 

 

나, 너……, 너 좀 세게 안아도 돼? 제발.” 성철의 말이 등 뒤에서 몽둥이처럼 선화의 머리를 때렸다. 선화는 흠칫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끄덕인다. 성철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선화를 조심히 앞으로 돌려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잠시 지구가 운동을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를 박동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p.159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복녀의 순댓국집은 그런 여성 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는 공간이다. 누구나 마음 놓고 드나들며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탈북자들끼리만 어울리는 닫힌 공간도 아니다. 복녀의 걸쭉한 입담을 듣고, 맛 좋은 순댓국을 먹기 위해 많은 남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아무리 그래도 북한 사람들은 혼기에 다 시집 장가를 갑지비. 헌신짝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잼메?”헌신짝이라? 하하하. 그렇게 헌신짝끼리 만나 살아도 행복할까?”그러재이쿠. 마음만 맞으면 당연히 행복하지비. 돈이라는 게 있다가두 없어지구 없다가도 생기는 게 아임메? 둘이 맞들고 벌면 돈이야 생기지비.”“우와, 이 북한 아줌마 생활관 하나는 똑소리 나네.” 손님들이며 주방에 서 있던 주방 아줌마며 모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선화도 청이를 흔들며 같이 웃었다. 요즘 순댓국집에서 복녀의 인기는 대단하다. 주로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오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순댓국집은 푸근하고 구김살 없는 복녀의 웃음으로 늘 떠들썩했다. ---p.148

 

 

 

 

 

 

 김유경은 탈북 후 남한에서는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론 풍족했지만 탈북자의 삶이란 게 만만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 문제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쓰인 작품이 『청춘연가』다. 주인공 선화·경옥 ·화영, 복녀 모녀 등 탈북자들이 남한에 정착하는 모습이 담겼다. 탈북자 문제는 물론, 북한의 경제 현실 등이 생생하게 묘사됐다. 작품은 완성됐지만 출판이 문제였는데 김유경은 소설가 김훈에게 원고를 보냈고 그의 주선으로 책은 빛을 보게 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탈북자의 고난을 소재로 한 소설은 많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북한의 실상을 고발한 탈북자 수기도 숱하다. 하지만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북한에서 정식 활동을 하던 작가가 남한에 들어와서 창작소설을 발표한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 여성 작가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나는 프로필이 없다. 나의 몸 절반이 아직 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실명은 물론 나의 과거 행적을 밝힐 수 없으며 숨어서 간신히 손만 내밀고 세상에 이 소설을 보낸다.”

 이 소설은 탈북자들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남한 사회 속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과정이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청춘연가》는 탈북자를 소재로 한 여느 소설과 달리 어두운 과거에만 붙들려 있지 않다. 이 소설의 스토리 전개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으며, 그간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탈북자들의 삶에 대한 재고와 전환의 계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