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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완서 장편소설『나목(裸木)』

by 언덕에서 2011. 11. 10.

 

 

 

박완서 장편소설『나목(裸木)』

 

 

 

박완서(朴婉緖1931∼2011)의 처녀작으로 1970년 [여성동아]의 장편 공모에 당선작 장편소설이다. 한국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의 서울을 배경으로 청춘의 성숙 과정과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길을 교차시키고 있다.

 박완서 자신의 체험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전체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51년에서 1952년에 걸치는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UN군에 의해 재수복되긴 하지만, 아직 환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서울이 배경인데, 작품 속의 화가 옥희도는 실존 인물인 화가 박수근으로 알려져 있다.

 고목은 이미 성장이 멈춘 나무이다. 그러나 나목은 지금은 죽어있는 듯 보이나 봄이 되면 잎이 돋아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무이다.

 6ㆍ25 전쟁 이후에 사회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서 황량한 세계였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경의 어머니는 잃은 두 아들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고, 옥희도는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한다. 황량한 정신의 소유자인 이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은 그 가능성의 발견에서 시작하는데, 이것을 작가는 나목이라는 상징물로 그려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ㆍ25 전쟁 중 서울 신세계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 일하는 이경은 불우한 화가 옥희도를 만난다. 처음 만나 그의 눈에서 '황량한 풍경의 일각'을 느낀 그는 옥희도에게 끌린다. 두 오빠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는 명동 성당과 완구점 앞에서 만남을 계속하면서 사랑을 느낀다.

 진짜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옥희도가 가게에 나오지 않자 그 집에 찾아가 캔버스에 고목이 그려져 있음을 목격한다. 두 오빠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던 어머니가 죽자 이경은 태수라는 청년과 결혼한다. 전쟁의 기억이 멀어진 만큼 세월이 흐른 뒤 옥희도의 유작전에 가서 예전에 봤던 그림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음을 알게 된다.

 폭격으로 인한 두 오빠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느끼며 살아가는 이경과 전쟁의 와중에 생활난 때문에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옥희도는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 낸 황량한 정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태엽을 감아야 온갖 재롱을 피우는 완구점의 침팬지처럼 어떤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의식 없는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옥희도의 유작전에 갔다가 그때 그 그림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무와 여인 (1956), 박수근(1914~1965) 작, 하드보드에 유채, 27 x19.5 ㎝

 

 이 작품은 6ㆍ25 전쟁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옥희도라는 미술가가 여성 화자의 관점에서 잘 그려져 있다. 전쟁의 삭막함 속에서는 고목으로 보였으나 안정된 상황에서는 나목으로 보이는 평범한 일상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통찰한 예술가의 혜안이 역설적으로 잘 드러난다.

 이러한 황량함을 평범한 여인의 일상생활로 되돌아가 극복하는 이경, 그리고 화가의 길에 들어서 작품을 남기고 떠난 옥희도는 꽃과 무성한 잎을 다시는 피우지 못하는 고목이 아니라 잠시 성장을 멈추고 어려운 한 시기를 극복하는 나목이었던 것이다.

 

 

 올해 초 타계한 박완서 작가는 바로 자신의 PX 경험담을 바탕으로 데뷔작 『나목』(1970)을 썼다. 이 소설에 나오는 화가 옥희도는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옥희도의 그림 ‘나무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박수근 화백의 실제 작품으로, 지난해에 열린 그의 45주기 회고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이렇게 그림 속 나무를 묘사하며 박 작가는 옥희도가, 즉 그 모델이 된 박수근 화백이 나목과 같다고 했다. 전쟁의 비참한 시대, 미군에게 싸구려 초상화를 팔아 연명하면서도 담담한 의연함을 잃지 않던 모습에서이다.

 

절구질하는 여인 (1954), 박수근 작, 캔버스에 유채, 130 x 97 ㎝

 

귀로 (1965), 박수근 작, 하드보드에 유채, 20.5x36.5 ㎝

 

 

 *한국전쟁은 박완서 작가가 수많은 작품을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중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이 작품을 보면 1·4 후퇴 때 서울에 온 인민군은 시민의 굶주림 문제는 아랑곳없이 선전예술 공연과 우파 색출에만 골몰하고 북으로 철수할 때는 노인들은 따라가길 원해도 거부하고 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고 갔다. 박완서 작가는 이때 끌려가다 용케 탈출했다. 또 6·25 발발 때 시민을 내버려 두고 먼저 도망친 남한 정부는 돌아와서는 인민군에게 밥 해줬다는 이유로 숙부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이때의 경험이 작가가 전후에 어느 쪽 이념에도 쏠리지 않고 인간을 직시하는 시각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 부분, 중앙일보 문소영 기자의 글을 참고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