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침부터 슬프다는 이야기
임영창 (1917 ~ 2001)
나의 시(詩)가
박하(薄荷) 솔 담배 연기와
교합(交合)하는 아침.
가을이 내 코 끝에 와 앉는다.
기지개를 쓰는 시혼(詩魂)이
나의 성감대(性感帶)를 간지르면
멀리서 들려오는 강릉 경포대(鏡浦臺)의 솔바람 소리.
나의 심장에
9월 18일의 캘린더가 걸린다.
나와 나의 세포들
그리고 안경도 만년필도
아침부터 피로롭다.
창백한 아침해가
덜 쇤 박처럼 떠오른다.
가을이 아침부터 슬프구나.
-<1986년 12월 18일>(문무사.1985)-
가을에 어울리는 시를 골라 보았습니다.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이 60세가 넘은 시기에 쓴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입니다. 그는 박하 향이 섞인 담배를 피우며 시를 짓다가 가을을 느낀 모양이군요. 그는 원고지 앞에 앉아서 자유자재로 아주 넓은 세상과 아주 작은 세상을 넘나듭니다. 이를테면 그는 `강릉 경포대의 솔바람 소리'도 듣고, 자신의 수많은 작디작은 세포들이 피곤해 함을 느낍니다.
가을은 한 해의 끝. 시를 쓰는 일도, 아름다운 곳의 풍경을 떠올리고 좋은 소리를 추억하는 일도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감지하는 유한한 생명의 쓸쓸함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는가요? 가을의 어느 날 아침부터 시인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시가 써지지 않아서도 아니요, 추억 속의 풍경이 아쉬워서도 아닐 것 같습니다.
오늘의 달력이 그의 심장에 걸리고, `덜 쇤 박처럼 떠오른' 아침 해가 창백하게 보이는 것은 좁게는 상투적인 가을의 애상이겠지만, 넓게 보아 그것은 유한한 생명의 끝이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가을을 `코 끝'으로 느끼며, `박하 솔담배 연기'를 통해 받아들인 `시'는 바로 이 시가 아닐까요. `가을은 아침부터 슬프구나'라는 마지막 연이며 동시에 마지막 행인 구절은 이 시의 다른 사설들을 모두 뜻 없는 넋두리로 만들고 홀로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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