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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시간들 / 안현미

by 언덕에서 2011. 9. 19.

 

 시간들

 

                                              안현미(1972 ~  )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입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입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 창비시선>

 

 


 

아, 위의 시는 몇 번을 읽어보았는데 읽을수록 슬퍼지네요. 시간이 화자인 시인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군요.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대자연 앞에서는 티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겠는지요? 모처럼 저를 시심과 사유의 뜰로 안내합니다. 시집에 있는 다른 시들도 같은 분위기의 연장선이었어요. 나이 들어 글을 통해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은성스런 축복입니다. 책장을 넘기다보니……. 좋은 시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의 산문시는 제목이 '안개사용법'인데 위 시에서 주는 느낌을 간직한 그대로의 서정으로 읽어야 할 것 같군요. 제목 없이 시를 적어보겠습니다.

 

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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