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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 <삼사라>

by 언덕에서 2011. 10. 6.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 <삼사라>

 

 

 

 

 

열반(Nirvana)의 대척점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하는 불교 용어, <삼사라>를 타이틀로 만든 영화다.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판 나린이 감독하고 숀 쿠, 종려시, 닐레샤 바브라 등이 주연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인도 등 4개국에서 합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종교영화의 범주에서 본다면 특별히 두드러지는 주제의식은 아니지만 결말부분이 전형성을 벗어나 있는 점은 매우 특이하고 사색을 요하게 만든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계속 보여준, 방황 끝에 도달한 점이 종교로의 회귀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곳에 도가 있다는 범우주적 깨달음이다. 영화는‘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는 선승들의 공안(公案)에 주목하는 138분 동안의 영화적 명상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는 어려서 라마승단에 들어온 타쉬의 고된 수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인도 위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나라 라지크가 배경이다. 삼년 삼개월 삼일이라는 기간 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동굴 칩거에 들어간 타쉬의 수행이 끝나고 승려들이 그를 데리러 갔을 때 그는 마치 앉아있는 미라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행을 마치고 회복기간을 거치는 그에게 뜻하지 않은 성적 충동이 밀려온다. 어두운 동굴에서 무아경에 빠져 있다가 사원으로 돌아온 그는, 뜻밖에 찾아온 성적 충동에 당황한다. 때늦은 제자의 사춘기에 당황한 스승은, 성행위의 형상들로 생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탄트라 유파 선승에게 제자를 보내 깨달음을 주려 하지만, 제2의 자궁과도 같은 컴컴한 동굴을 이제 막 빠져나와 삶의 경이에 몸을 떠는 제자에게 글과 그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연히 마을로 수행을 떠나 머물게 된 민가에서 만난 페마라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타쉬는 그녀에 대한 욕정을 지울 수 없어 환속을 결심하고 사찰을 떠나게 된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통찰에 타쉬는 페마의 관능을 품기 위해 기꺼이 파계하고 라마승단이 있는 저편과 마을이 있는 생활인들의 이편을 가르는 강에서 몸을 씻는다. 그곳에서 라마승 타쉬는 완전히 죽고 애견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속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놀랍다.

 

 

 

 우여곡절 끝에 페마와 결혼한 타쉬는 농사일을 하면서 자식을 낳고 촌부로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때로는 농사일로 인해 위험한 갈등을 겪고 농사일을 도우러 온 인도 처녀와 외도를 저지르기도 하며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욕망의 덫에 스스로 빠짐을 즐기는 듯 하다.

 

 

 욕망의 끝에 선 그는 속세의 종말이 무엇인가 하는 종교적 깨달음에 다시 한 번 흔들린다. 마침 사찰의 스승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그는 과거 수행하던 사찰을 향해 떠나게 된다.

 다시 승려로 돌아간 타쉬가 부인 페마에게 돌아와 자초지종을 말하자 페마는 울부짖으며 그에게 일갈한다. 사람들은 붓다가 수행의 길을 떠났을 때 그의 부인이 겪었을 아픔은 외면한 채 오로지 깨달음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타쉬는 욕망을 해결할 길이 없어 수도자의 길을 떠나 속세로 들어왔고 이제 그 욕망의 끝에서 다시 깨달음을 얻는다고 속세의 인연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린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곳에 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페마는 그에게 일침을 놓는다. 타쉬는 페마의 쓴 소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 그 역시 괴로움에 절규한다. 

 그렇게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에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돌이었다.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는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서 그 돌의 문구를 바라보던 타쉬는 그 돌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문구를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된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에 대한 답이 돌의 뒷면에 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라고 쓰여 있다.>

 

 강물을 오직 성과 속의 경계로만 인식하는 남편 타쉬와 달리 지혜로운 아내 페마는 부지런하게 매일의 일상에 만족하며 노동을 쉬지 않고 강물을 바다라는 큰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생의 의미를 읽어낸다. 급기야 폭력과 욕정에 패배하고 다시 도하하는 남편에게, 처음의 화두, “하나의 물방울이 어떻게 하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넘겨주는 것이다. 영화는 이때, 아슬아슬하게 전형적인 결말을 벗어난다. 타쉬는 산정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삼사라의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열린 결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성과 속의 구분을 떠나 ‘어느 곳에나 도가 있다’는 문구를 이미 알고 있는 페마의 영성(靈性)이다.

 


 방황하는 타쉬의 고뇌와 욕망의 중심에서 속세의 연이 되어버린 페마는 타쉬가 깨닫지 못하는 진리의 중심축에 서 있다. 욕망에 벗어난다고 진리가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옆으로 새는 이야기 같지만 성철스님이 설법했던 세상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건 간에 도를 구하는 길은 열려 있으며 삼라만상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가르침과 같다. 영화는 페마의 범우주적인 깨달음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데 여성성과 노동으로 대표되는 삶의 현실적인 축을 깨달음의 한 축으로 인정한다. 종교적 이상을 궁극으로 생각해왔던 종래의 특별한 우위를 대체한 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라다크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삼사라>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 지역인 라다크 지방이 배경이며, 현지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됐다. 라다크는 워낙 인구가 적어 국경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히말라야 해발 3,505미터에 달하는 고산 사막지대에 있으며, 주민 대부분은 티베트 불교 신자다. 근대에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외부의 접근이 통제되었는데, 1975년 까지 천년이 넘게 고유문화를 유지해 왔다. 워낙 아름답고 빼어난 자연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 곳에나 카메라를 위치시켜도 모두 그림이 되는 곳이기에 영화의 화면은 숭고하고 유장하다. 페마와의 육감적인 정사장면들이 따라붙기는 해도, 영화는 성애를 종교적인 것으로 바꾸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히말라야 산맥과 초원, 사막과 호수의 광활함을 모두 간직한 라다크 지방의 영적 분위기만 가필해 넣을 뿐이다. 카메라는 잠시 넋을 잃고 파계한 라마승이 아이를 낳고 농사일을 돌보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장사치에게 분노하며 추수를 도우러 온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그 동안에도 이 풍경들을 물끄러미 관조한다. 별다른 장치 없이도 영화가 숭고한 기운을 내뿜는 것은 이 풍경과 튀지 않으려는 특유의 유장함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