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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사르트르 장편소설『구토(嘔吐.La nausee)』

by 언덕에서 2011. 8. 19.

 

사르트르 장편소설『구토(嘔吐.La nausee)』

 

 

 

 

 

프랑스 철학자·작가 J.P.사르트르(Sartre Jean Paul.1905 ∼ 1980)의 장편소설로 1938년에 발표되었으며, 30세의 연금생활자 로강탱의 일기체 수기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담은 첫 장편소설이며, 앙티로망의 선구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사르트르의 첫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텡은 사물과 의식의 대립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존재와 무>(1943)에서 철학적으로 분석됐던 문제다. 사르트르는 소설을 내기 6년 전 펴냈던 <존재와 무>를 통해 의식ㆍ비사물성(무ㆍ無)을 객관적 사물성(존재)에 대비시켰다. 문학은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를 형상화하는 하나의 장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방법을 종합하려 했던 플로베르에 관한 전기 정도가 예외이다. 1945년부터 4년에 걸쳐 나왔던 3권짜리 <자유에의 길> 연작을 통해서 사르트르가 제기한 것은 행동, 특히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할 때 맞닥뜨리는 윤리적 딜레마였다.

 사르트르는 <자유에의 길> 연작 3부에 해당하는 <영혼의 죽음>을 완성한 뒤 소설보다는 희곡 창작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말을 옮기자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가장 참다운 인간인데, 희곡이 바로 그것을 그린다.”는 생각이었다. 장르는 바꾸었지만, 실존주의의 형상화는 계속됐다. <더러운 손>(1948), <알토나의 유폐자>(1959)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살도 비슷하게 ‘행동’과 관련된 딜레마 때문으로 해석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닫힌 방>(1944) 역시 인간관계의 불가능성이라는 실존주의의 주제를 다뤘다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8)를 통해 ‘문학은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직접 창간했던 「현대」지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 작품 『구토』는 엄밀히 말해서 소설은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관심들로 가득 찬 에세이와 같은 느낌이 들고, 뚜렷한 사건도 없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구토>는 최초의 앙티로망(반 소설)이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작가 J.P.사르트르( Sartre Jean Paul.1905 ∼ 1980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0세의 주인공 로강탱은 예전에는 애인 ‘아니’가 있었지만 지금은 가족도 없고 완전히 혼자이다.

 다만, 가끔씩 호텔 마담과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그에게 일종의 동경을 품고 접근하는 ‘독학자’와의 대화를 하는 정도 이외에는 전혀 인간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방해물을 제거한 인간이며, 존재 이유에 의문을 던져주는 구토증을 체험한 인물이다.

 주인공 로강탱은 드 로르봉 후작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부빌이라는 곳에 머무는 중 카페의 마담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기도 하지만, 매우 고독하고 변화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인공 로강탱이 일기를 쓰게 된 것은 얼마 전부터 외계의 사물이나 인간들이 가져다주는 구토증의 의미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토증이란 결국 존재 그 자체가 우연이고 부조리이며, 존재계가 모두 의미와 필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는 그것을 옛 애인 아니와의 6년만의 재회를 앞두고, 공원의 마로니에를 응시하다가 직감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아니도 옛날의 신비적 매력을 잃고 타성에 젖은 허무감 속에서 살고 있다. 절망한 로강탱은 역사 연구도 포기하고 그 곳을 떠나면서 재즈음악이 주는 감동 속에 장차 소설을 쓰는 것이 구원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희망을 가져보는 데서 소설은 끝난다.

 

 

2010년에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가 사르트르 서거 30주년을 맞아 대학로에서 무용 무대에 올랐다. 세컨드네이처컴퍼니는 “숨이 막히도록 토해내는 무용수들의 몸짓에서 실존적인 고민과 생의 의지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부빌이라는 가공의 도시를 중심으로 역사학자인 앙트완 로강탱의 일기 형식을 빌려 쓴 작품이다. 로강탱은 30세로 부빌의 부르주아들은 사정없이 비웃고 있지만, 그는 기존 질서와 습관을 벗기 위한 자유에 대해 항상 괴로워한다.

 그는 바닷가에 널려있는 조약돌이나 문의 손잡이 따위 등에도 구역질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로강탱은 이 구토감의 본질을 추적해 가고, 외계의 사물이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구토감을 일기에 상세히 기술한다. 즉, 그가 느낀 구토감의 원인은 사물의 존재에 있었다.

 로강탱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아래 마로니에 뿌리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강탱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것을 ‘뿌리’라고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강탱에게 그것은 이미 어떤 존재의 도구로 다가왔다. 마로니에 뿌리는 인간이 부여한 언어의 기초가 아닌 존재의 본성으로 나타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로강탱과 아무런 연관도 없이 다만 동떨어져서 존재할 뿐이었다. 이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과 자기와는 모든 관습과 때 묻은 의미를 제거해 버린 것을 뜻한다. 로강탱은 이러한 의미 없는 사물의 현존 앞에서 놀라고 당황한다. 그리하여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로강탱에게 ‘구토’를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로니에 뿌리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구토감의 허무주의에서 이유를 부여하게 되고, 실체에 목적을 두기 위한 사고가 일어난다. 그는 깊은 절망감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절망감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소설을 쓰기로 하고 희망을 갖는다. 이 희망으로의 회귀는 작자 자신의 주요한 명제인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존재하고 있는 사물에 본질이 부여됨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사르트르의 철학을 가장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현재 실존철학의 맹주로서의 사르트르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이 바로 이 작품 『구토』일 것이다.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