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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이 2000년 선보인 영화로, 1996년부터 기획했던 <북경지하>의 후편쯤 되는 작품이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촬영을 시작했던 <북경 지하>가 중국 당국의 검열 문제로 천안문 광장 촬영이 불가능해지면서 제목도, 내용도 다른 영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양조위와 장만옥이 나오는 사랑 이야기라는 큰 틀에는 변함이 없다. ‘화양연화’는 ‘사람의 가장 황금기 시절’을 뜻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남우주연상, 고등기술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두 가구가 동시에 이사를 온다. 무역회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리첸(장만옥)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지역 신문의 데스크로 일하는 차후(양조위)와 그의 아내. 리첸의 남편은 사업상 일본으로 출장이 잦다. 차후의 아내 또한 호텔에서 일하는 관계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차후와 리첸은 자주 부딪히게 되고 가까워진다.
차우는 리첸이 아내와 똑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으며 리첸은 차우가 남편과 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배우자가 자신들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첸은 남편의 곁을 떠나지도 못한 채 슬퍼하고 차우는 그런 리첸을 위로하며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둘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남긴 채 헤어진다.
리첸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리첸에 상처가 될까 봐 차우가 싱가포르로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리첸은 몇 년 후 싱가포르를 찾아가 차우에게 전화를 건다. 차우가 전화를 받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기만 하던 리첸은 조용히 전화를 끊는다.
또 몇 년 후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는 과거에 자신과 리첸이 살던 아파트를 들른다.
얼마 후 차우는 이웃한 나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고성을 방문한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번성했던 폐사지의 흔적은 변함없이 남아있다. 차우는 유적의 나무구멍 속에 리첸의 향한 자신의 마음을 파묻는다. 배경 음악이 흐르는 동안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화양연화'는 자신의 아내 그리고 남편과 바람을 피운 자들의 배우자들이 만나 급기야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의 작품이다. 불륜과 로맨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영화 속 화면에는 주인공 둘은 사랑하나 육체적 관계는 갖는 듯하다(아닐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배우자도 영화의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화양연화'의 전체를 감싸는 정조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시한부 연인들의 강렬한 절망적 충동이다. 어차피 헤어질 것을 알기에 그리고 헤어짐을 일종의 운명으로 여기는 그들이기에 둘은 서로의 감정을 아끼고 단속한다. 열정과 연민이 뜨거운 상처가 될까 봐 그들은 마음을 다잡고 또 여민다.
♣
이별 영화였던 탓도 컸지만 왕자웨이 감독이 선택한 현악기 연주와 장만옥, 양조위의 절제된 연기가 관객들을 단숨에 휘어잡는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서로의 배우자가 부재한 가운데 남자와 여자는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간다. 그런데 심상치 않다. 둘은 이미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서로를 연민하고 또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도저히 얼굴을 맞대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좁은 골목에 갇혔음을 느낀다. 이때 여자가 말한다. 우리 언젠가 헤어져야 하잖아요. 헤어지는 연습해 봐요. 그래서 둘은 연습한다.
잠시 후, 리첸이 울기 시작한다. 그녀의 울음은 오열로 뒤바뀌어 온몸을 들썩인다. 차우는 여자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는데, 남자는 그저 그녀 리첸의 어깨를 감쌀 뿐이다. 화면은 그녀의 어깨를 부서지라 쥐는 남자의 손에 초점을 맞춘다. 리첸을 감싸 안은 손의 힘에 비례해서 차후의 슬픔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차우는 아픔을 안고 싱가포르로 떠난다. 자신들의 사랑이 더 큰 상처로 남을까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이는 리첸이 남편을 떠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그런 듯하다. 결국,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돌담에 차우는 사랑의 비밀을 묻고 돌아선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비만 오면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이 영화는 사랑이란 아픈 상처이자 쓰디쓴 통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화양연화'는 이별에 관한 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앙코르와트로 가기 전에 리첸……. 나는 오래전에 우리가 이웃하며 함께 보냈던 그곳으로 갔소. 모든 것은 다 변해 있더군. 바뀐 집주인은 내가 살던 옆집, 그러니까 당신이 살던 집에 아이 하나를 키우는 부인이 살고 있다고 했소. 나는 그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확인하지 않은 것 또한 나의 예의리라 생각했소. 뚜벅뚜벅 발소리를 남기며 나의 한 시절을 지나쳤소.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겠지. 추억은 추억이니까……. 우리들의 '화양연화'는 거기까지였으니까……. 사랑하는 리첸……. 이제 당신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소. 앙코르와트의 나무구멍 속에 파묻은 것은 한 시절 나의 소심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고, 당신은 점점 더 자라서 내 마음 안에 하나의 나무가 되었소.
사랑하는 리첸……. 내 안에서 당신은 늘 눈부신 차파오를 입고 가녀린 어깨를 조금 비틀어 내 곁을 엇갈려 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당신의 안타까운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내 마음 안에 붙들어 놓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시절을 참아낼 것이오.
당신을 그렇게 영원히 사랑할 것이오. 그 방식이 당신을 쓸쓸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조금씩 영원히 사랑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라오. 당신의 쓸쓸하고 단정한 그 모습 안에도 환한 웃음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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