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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풀 / 김수영

by 언덕에서 2011. 6. 4.

 


 





                                              김수영(1921 ~ 1968)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인 1968년 5월 29일 쓴 마지막 작품으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작되었습니다. 그의 사후(死後)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지요. 4ㆍ19를 계기로 사회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이던 그의 시는 이 <풀>과 같은 작품을 통해 보다 심화되고 마침내 정돈되었습니다. 내포하는 의미가 깊지만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굵고 튼튼한 톤으로 소리 높이 울리던 만년(晩年)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풀>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서정적인 목소리의 여운을 풍기지요.

 시인들은 때때로 평범한 자연 현상 속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비유 또는 상징을 발견합니다. '풀' 역시 그러한 작품이네요. 이 작품의 표면적 구조는 매우 단순합니다. 어느 흐린 날 비가 오기 직전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을 생각해 보면 되지요. 그 들판에는 아주 여린 무수한 풀들이 돋아나 있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어 풀들을 눕히고, 쓰러뜨리고, 또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풀은 다시 일어나 웃지요. 이것이 이 시의 표면적 내용입니다.

 이 작품의 표면적 문맥은 굳이 해설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단순하군요. 땅 위에 숱하게 돋아나 있는 풀이 비를 몰아오는 바람에 나부껴 눕고 울다가 마침내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입니다. 물론 이처럼 단순한 내용만으로 요약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과 반복되는 말을 통한 리듬의 흐름이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은밀한 공감을 일으키는 점은 따로 유의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시는 분명히 풀과 바람 그 자체만을 노래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풀과 바람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군요.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풀은 세상에 있는 생물 중에서 가장 흔합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지요. 풀은 또한 모든 목숨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질기지요. 그것은 일부러 가꾸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자라나고, 없애려고 하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속성으로 해서 풀은 `세상에 무수히 많이 있으면서 어떤 시련에도 견디어 내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쉽게 이해됩니다. 이 작품에서의 풀 역시 그러하네요.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의 근본적 의미는 대략 드러나는군요. 풀과 바람의 싸움은 곧 이 세상에 무수히 있는 굳센 생명들과 그것을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괴롭히는 힘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하잘것없는 듯이 보이는 생명의 끈질긴 힘이야말로 모든 외부적 억압을 이겨내는 것임을 지극히 평범한 말씨와 어조로,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하는군요. 어쨌든 오늘 저는 서정적인 느낌으로 이 시를 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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