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대표한 두 작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영화 <서편제>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더듬어보려는 시도가 1990년대에 봇물처럼 유행한 적이 있다. 그때 <소설 동의보감>과 <소설 목민심서> 같은 책이 있었는데 이 둘을 읽지 않으면 팔불출 취급을 당했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역사적인 인물인 허준의 배경과 사실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의태가 실존인물이 아님을 나중에 알고 쓴 웃음을 지었다. <소설 목민심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공자 사상의 핵심은 사라지고 몇몇 귀족들만 위한 유교 관료 체제만 남았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적 독립성과 윤리를 가르쳤지만 노론이라는 정당이 좌지우지한 조선 말기의 유교는 백성을 착취하는 쓰레기 관료주의 강령이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으면 처량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목민심서>는 관료, 즉 벼슬아치가 치해야 할 행동거지 지침을 피곤할 정도로 시시콜콜 정리한 매뉴얼에 다름 아니다. 정약용이 좀 더 힘이 있고 노골적인 사람이었다면 오줌은 최대 두 시간마다 한 번씩만 누고 대변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안된다고 썼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당시 유교 관료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염치가 없었으면 이런 식의 쪽팔리는 메뉴얼을 만들었을지 나름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암흑 속에 빛나는 별같은 인물이었지만 대부분의 조상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1990년대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회고하며 그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이하 나문답>와 영화 <서편제>가 아닐까 한다. 두 작품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조상의 얼’을 더듬은 덕분에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서편제>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이청준의 원작을 다시 읽어보게 만들었다.
<나문답>은 별 볼일 없이 지내고 있던 유홍준을 민주투사의 반열에 올림과 동시에 그간 그가 지니고 있던 지방대학 교수의 콤플렉스를 한방에 희석시켜 주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둘 다 실패작에 다름 아니다. <나문답>은 ‘조상의 얼’의 본질 근처에 맴돌다 말았고, <서편제>는 조상의 에너지를 병리적인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문답>에 실린 유홍준의 아래글을 읽어보자.
수덕사 대웅전 건축의 중요한 특징은 배흘림기둥이다.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전에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저 팽팽한 팽창감의 배흘림기둥이 탄력 있게, 어찌 보면 상큼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서 우리에게 하등의 시각적 불편이나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유홍준의 <나문답>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우리 조상들은 슬기로웠다. 우리 조상들은 독특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알았다.”
그의 주장은 맞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슬기롭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무엇을 위한 지혜였는지, 중국과 구별되는 독특함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지혜는 삶의 비밀에 관한 통찰이다. 조상의 지혜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절박한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그들이 어떠한 통찰을 가졌는지를 말해야 한다. 또한 독특함이란 <무엇에 대한 차이>이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에 있어 그 <무엇>은, 유홍준이 예로 들은 그리스가 아닌 중국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축, 조선 예술의 독특함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중국에 대한 비교가 포함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유홍준의 <나문답>에는 우리 조상이 왜 지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고, 한국 문화를 중국과 비교하여 그 독특함을 설명하려는 노력도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은 “조선 사람이 조선민족에 바치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라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유홍준은 최근 <한국 미술사강의>라는 책을 내면서 "한국미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많이 갖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라며 "예를 들어 서양 중세가 기독교 문화가 판친 시대라고 해서 누가 그것을 이스라엘 문화의 아류라고 하는가"라며 "고려가 청자를 만들지 않았으면 청자의 역사는 중국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되면 절정의 나름시시즘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청장 시절 세종대왕릉에서 관료들을 모아놓고 오찬을 하는 등 문화재에 대해 개념이 없었던 그는 책을 내기보다는 숭례문을 태워먹은 죗값을 안고 평생을 반성하면서 사는 게 맞아보인다.
영화 <서편제>는 천년 동안 축적되어 온 ‘정신의 긴장’을 조명했다. 소리의 완성을 이루겠다는 무서운 집념의 세계를 정말 아름다운 영상과 겹쳐서 그려냈다. 그러나 <서편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정신의 긴장’을 괴물 같은 병적인 집착으로 표현했다. 유봉은 소리를 잘 낼 수 있게 한답시고 일부러 수양딸의 눈을 멀게 만든다. 또 유봉이 눈 먼 송화의 머리를 빗겨 주고 비녀를 꽂아 주는 장면을 상기시키면서 근친상간 관계라는 의심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송화는 사생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좀 냉철하게 따져보자. 우리 조상의 지혜는 온건함과 순리의 자연스러움에 있었지 이런 식의 병적인 강박증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상들은 아악(雅樂)처럼 유장(悠長)하고 온건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서편제>는 소리의 완성을 위해 수양딸의 눈을 멀게 만드는 정신병자 같은 강박증이 마치 조상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를 남겼다. <서편제>는 우리 조상들이 키워왔던 ‘정신의 긴장’을 건드렸지만, 그 특질은 간과한 것이다.
중고생을 위한 논술 시험지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본 적이 있다.
● 질문 : 유봉은 약을 먹여 소리를 중단한 자기딸 눈을 멀게 하였다. 어째서 송화가 장님이 되면 소리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유봉은 생각하였을까?
● 정답 : 일단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심심해서라도 소리를 할 것이다. 게다가 눈이 멀면 청각기능이 발달하여 소리에 예민해진다.
차라리 <서편제>나 <나문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2000년경에 조상의 정신세계를 정확하게 읽어낸 책과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작품의 악영향은 컸다.
참고 : 1. 최순우 : 한국미술사
2. 박성현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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