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디오게네스는 왜 '개 같은 생활'을 했을까?

by 언덕에서 2011. 4. 23.

 

디오게네스는 왜 '개 같은 생활'을 했을까?

 

 

견유학파(犬儒學派)란 무엇일까? 견유학파는 그리스 철학의 한 유파로 그 명칭은 창시자 안티테네스의 학교 소재지인 아테네의 Kynosarges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학파의 '개와 같은 생활' 때문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퀴닉스 학파라고도 한다. 행복은 유덕한 생활에 있으며 유덕한 생활이란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생활이며, 이것은 강인한 의지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에 의하여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파의 가르침이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BC 400?-BC 323?)

 

 

 그들은 지극히 간소한 생활과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창도하여, 문명사회의 관습 및 제도를 무시하고, 걸식 생활을 실행하기도 했다. 전설적으로 유명한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겠다. 이 학파는 후에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시니시즘(cynicism)이라는 말은 이 학파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론, 습속, 통상적인 도덕 등을 무시하는 생활 태도를 의미한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라파엘로가 1511년 무렵에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벽화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등이 대부분 등장한다. 현재 로마 바티칸 궁전의 `서명의 방`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 작품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수학자인 피타고라스, 히파티아 등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당연히 디오게네스도 그림 중앙의 계단 한가운데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흑해 연안의 시노프 출생이다. 퀴닉학파, 즉 견유학파(犬儒學派)의 대표적 인물이며, 이른바 ‘통 속의 디오게네스’로 알려졌다. 젊어서 화폐 위조죄로 고향에서 쫓겨나 아테네로 망명했는데, 그 뒤로도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가짜돈 주조 즉 공인된 가치와는 다른 가치의 창조를 지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안티스테네스의 학통을 이어받아 온갖 물질적 허식을 배제하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만으로 사는 자연 상태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自足) 생활을 실천하였다. 노미스마(nomisma: 通貨)의 개주자(改鑄者)는 노미스마(관습)의 개혁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옷도 걸치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으며, 들개처럼 길거리에서 잠자고, 통 속을 집 삼아 사는 등 그 자신도 빈곤ㆍ무치를 바탕으로 한 자족의 생활을 보냈다. 그 때문에 개라는 별명이 생겨, 그 일파는 견유학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는 유명하니 생략하도록 하자.

 

 

▲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가 나눈 대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전설로도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유쾌한 사상가였다. 그는 평생 동안 거의 발가벗은 상태로 나무통을 집 삼아 살았다. 개가 땅바닥에 있는 먹이를 핥아먹는 모습을 보다가 불현듯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산인 밥그릇을 깨버렸다고 한다. 그의 인생 전체는 파격적인 풍자 행위예술, 그 자체였다. 시장 통 한가운데서 자위행위를 하고 극장에 대변을 싸놓기도 했다. 집 안을 호화롭게 꾸며놓은 어느 졸부가 그를 초청했는데, 그 졸부의 얼굴에 태연히 가래침을 뱉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집은 너무도 훌륭해서 당신 얼굴밖에는 침을 뱉을 곳이 없군.”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BC 400?-BC 323?)

 

 그가 말년을 보낸 코린트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에 의해 침공당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코린트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채 여기 저기 몰려다니면서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디오게네스가 보기에는 겁 많고 유약한 코린트인이 용맹한 야만성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에 대항한다는 일은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던 꼴을 지켜보던 디오게네스는 문득 자신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무통을 굴리며 왔다 갔다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왜 통을 굴리고 다니는 거요?“

 “나도 남들처럼 무엇인가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소?”

  그리스 사람들은 디오네게스를 ‘개’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개는 ‘시닉(cynic)'이다. 시니시즘은 원래 냉소주의란 뜻이 아니라 “개 같이 살자!”라는 주장을 뜻했다. 이때 ’개 같이 산다‘는 것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일반적 관념과 가치를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BC 400?-BC 323?)

 

 한번은 디오게네스를 식사에 초대한 사람들이 그에게 음식 뼈다귀를 던져주었다. 디오네게스는 개답게 응수했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그 사람들에게 오줌을 갈겼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디오게네스와 같은 개인주의자는 매우 드문 케이스에 속한다. 한 도시국가의 시민 전체가 전쟁에 져서 학살당하고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강력한 전제주의의 원리가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자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에 대해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광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디오네게스가 광인과 같은 기행을 일삼으며 개처럼 살지 않았다면 잔혹한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친 놈’ 혹은 ‘개 같은 놈’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명대로 살 수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제거함으로써 온갖 인습과 권위로부터 해방되는 것, 이것이 영혼의 자족을 지향하는 그의 철학적 실천이었다. 그의 제자 크라테스(테바이)는 이 같은 스승의 학설을 널리 펴서, ‘무소유’야말로 일체의 고통ㆍ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비결이라고 주장하여 뒷날 스토아학파의 탄생을 예고했다.

 

 

 

 

** 참고 : 박홍규 저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박성현 저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