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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사회운동가. 우국지사.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

by 언덕에서 2011. 5. 13.

 

사회운동가. 우국지사.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權重熙 : 1936 ~ 2007)

 

 

 

사회운동가. 우국지사.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1936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 배후를 약 50년간 쉬지않고 끊임없이 추적한 집념의 인생을 살았다.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은 뒤 김구 암살 사건의 범인으로 판명된 안두희에 대한 처벌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정부에 탄원을 해 왔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2년부터는 직접 추적으로 방향을 바꾸고 안두희의 뒤를 쫓은 끝에 1987년 서울시 마포구청 앞에서 안두희를 폭행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 일로 그는 폭행죄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이후 그는 안두희가 숨어있는 곳을 끈길기게 찾아 여러 차례 면담하고 백범 암살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김구 암살 지시를 받았다는 안두희의 증언을 공개했다.

 1997년 그는 안두희의 증언을 공개했다. 그러나 안두희는 추후 이 같은 증언은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고 부인했다. 안두희가 범죄자이나 법에 의한 처벌이 아닌, 개인에 의한 사적인 물리적 제재가 옳은 행위인가에 대해 당시 논란이 되었다


 권중희는 193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3살 때 <백범일지>를 읽고 민족정기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는 1956년 서울에 올라온 후 안두희 응징을 위해 정부에 지속적으로 탄원을 하는 등 노력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82년부터 직접 안두희 추적에 나서 결국 1987년 3월 26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안두희를 몽둥이로 응징한다. 권중희는 자신이 안두희에게 가한 폭행이 '폭행'이 아니라 역사적 죄인에 대한 '응징'이라는 표현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권중희는 1990년 10월에는 안두희가 미정보기관 전략사무국(오에스에스) 요원이었다는 사실도 확인, 공개했다.

 그 후에도 그는 거처를 안두희 집 근처로 옮기고 안두희 집 근처에서 매일을 소일하며 그에게 설득과 회유를 해왔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백범암살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노력을 했다. 1991년과 1992년에도 안두희를 만나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암살 지시를 받았다’는 자백을 받는 등 백범 살해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입수, 진상 규명에 주력했다. 

 안두희는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두희는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권중희에 의해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 안두희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침묵으로 일관하여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자백은 권중희의 고문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 거짓말이라고 항변했다.

  권중희의 저서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버스 기사 박기서에 의해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이른바 '정의봉'으로 척살당했다. 권중희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는 박기서는 국부(國父)를 시해한 죄인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안두희 척살 당일 박기서는 권중희에게 안두희 '응징' 실행을 전화로 이야기한 걸로 알려져 있다.

 

 권중희는 1995년 5월부터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도 자신이 만든 민족정기구현회 회장과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고문으로 민족 자주와 통일에 헌신했으며, 특히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며 수많은 글들을 집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이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2004년에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방문, 백범관련 자료를 찾는 등 열정을 불태웠다.

 권중희는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저서를 남겼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컴퓨터 앞에서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개탄하는 글을 쓰다 쓰러졌다.

 

 


<김구 암살 배후 추적 권중희씨 자택서 숨져> [중앙일보 2007.11.19]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기 위한 활동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권중희씨가 16일 오후 5시쯤 세상을 떠났다. 71세. 권씨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자택에서 혼자 컴퓨터로 글을 쓰다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전해졌다.

 권씨는 1987년 3월 숨어 살던 백범 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1996년 사망)씨를 찾아내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폭행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자(68)씨와 장남 태정(43)씨 등 2남1녀가 있다. 장례는 '고 한길 권중희 선생 장례위원회'가 주관해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7시30분. 장지는 마석 모란 민족민주열사 묘원. 02-590-2576.

 

 


<안두희에 ‘심판’ 내린 응징자들>- [동아일보](1999. 3. 11)

 50년대엔 거리를 활보했던 백범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씨는 60년 4ㆍ19혁명 직후 [백범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위원장 김창숙ㆍ金昌淑)가 결성되면서 ‘도망자’가 된다. ‘법적 시효’로부터는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역사의 시효’를 믿으며 그를 응징하려는 사람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1965년 12월 20대 후반의 청년이던 곽태영(郭泰榮ㆍ63ㆍ백범독서회회장)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고 있던 안씨를 공격한다. 그는 칼로 안씨의 목을 두 군데나 찔렀으나 안씨는 세 차례에 걸친 뇌수술 끝에 극적으로 살아났고 그때부터 ‘심판자’들을 피해 더욱 필사적인 은신에 들어갔다. 민족정기구현회회장인 권중희(權重熙ㆍ63)씨는 ‘집요한 응징자’였다. 15세 때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을 민족혼으로 받아들였다는 그는 80년대초 안씨가 미국이민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추적에 나섰다.

 권씨는 87년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안씨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한 차례, 1992년 세 차례에 걸쳐 응징을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암살배후에 대한 안씨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후의 응징자’는 박기서(朴琦緖ㆍ49)씨. 버스운전기사였던 그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안씨의 집을 찾아가 이른바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박씨의 집에서는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등 백범 관련서적 10여 권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