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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대금 산조 / 정목일

by 언덕에서 2011. 5. 26.

 

 

 

대금 산조

 

                                                                     정목일 (1945 ~ )

 

 

 

 

 

1.

 

 한 밤중 은하가 흘러간다.

 이 땅에 흘러내리는 실개천아. 하얀 모래가 푸른 물기 도는 대밭을 곁에 두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아.

 흘러가라. 끝도 한도 없이 흘러가라. 흐를수록 맑고 바닥도 모를 깊이로 시공(時空)을 적셔가거라.

 그냥 대나무로 만든 악기가 아니다.

 영혼의 뼈마다 한 부분을 뚝 떼어 내 만든 그리움의 악기….

 가슴속에 숨겨 둔 그리움 덩달아 한(恨)이 되어 엉켜 있다가 눈 녹듯 녹아서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다.

 눈물로 한을 씻어 내는 소리. 이제 어디든 막힘없이 다가가 한 마음이 되는 해후의 소리ㅡ.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불러 보고 싶은 사람아.

 마음에 맺혀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아.

 고요로 흘러가거라. 그곳이 영원의 길목이다. 이 세상에서 깊고 아득한 소리. 영혼의 뼈마디가 악기가 되어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ㅡ.

 

 영겁의 달빛이 물드는 노래이다.

 솔밭을 건너오는 바람아 눈보라와 비구름을 몰고 오다가 어느덧 꽃눈을 뜨게 하는 바람.

 서러워 몸부림치며 실컷 울고 난 가슴같이 툭 트인 푸른 하늘에 솜털구름을 태워가는 바람아.

 풀벌레야. 이 밤은 온통 내 차지다. 눈물로도 맑은 보석들을 만들 줄 아는 풀벌레야. 내 소리 천지 가득 울려 은하수로 흘러가거라.

 사무쳐 흐느끼는 네 음성은 점점 맑아져서 눈물 같구나.

 그리움의 비단폭 같구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임의 손길 같구나.

 한순간의 소리가 아니다. 평생을 두고 골몰해 온 어떤 물음에 대한 깨달음. 득음(得音)의 꽃잎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으로 흘러가는 소리….

 이 땅의 고요와 부드러움을 한데 모아, 가슴에 사무침 한데 모아 달빛 속에 흘러 보내는 노래이다.

 한때의 시름과 설움은 뜬구름과 같지만, 마음에 쌓이면 한숨소리도 무거워지는 법.

 아무렴 어떻거나 달빛 속으로 삶의 가락 풀어 보고 싶구나.

 그 가락 지천으로 풀어서 달이나 별이나 강물에나 가 닿고 싶어라.

 가장 깊은 곳으로 가장 맑은 곳으로 가거라. 한 번 가면 오지 못할 세상. 우리들의 기막힌 인연. 속절없이 흐르는 물결로 바람으로 가거라.

 가는 것은 그냥 간다지만 한 점의 사랑. 가슴에 맺힌 한만은 어떻게 할까.

 

 달빛이 흔들리고 있다.

 강물이 흔들리고 있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가장 적막하고 깊은 밤이 숨을 죽이고, 한줄기 산다는 의미의 그리움이 흐르고 있다.

 

2

 

 대금의 달인(達人) L씨의 대금산조를 듣는다. 달빛 속으로 난 추억의 오솔길이 펼쳐진다.

 한 점 바람이 되어 산책을 나서고 있다. 혼자 걷고 있지만 고요의 오솔길을 따라 추억의 한복판으로 나가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 명상에 빠져 움직이지 않지만 잠든 것은 아니다.

 대금산조는 마음의 산책이다. 그냥 자신의 마음을 대금에 실어 보내는 게 아니다. 산의 명상을 부르고 있다.

 산의 몇 만 년이 다가와 선율로 흐르고 있다. 몇 만 년 흘러가는 강물을 불러 본다. 강물이 대금 소리를 타고 흘러온다.

 대금 산조는 마음의 독백이요 대화이다. 산과 하늘과 땅의 마음과 교감하는 신비체험ㅡ. 인생의 한순간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소리이며 한순간이다. 산이 되어 영원 속에 숨을 쉬는 소리이다.

 대금 산조는 비단 손수건이다. 삶의 생채기와 시름을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다.

 대금 산조를 따라 마음의 산책을 나서면, 고요의 끝으로 나가 어느덧 영원의 길목에 나선다. 아득하기도 한 그 길이 고요 속에 평온하게 펼쳐져 있다. 달인이 부는 대금 산조엔 천 년 달빛이 흐르고 있다.

 

 

 

 

 

 

 

 

 

정목일. 경남 진주 출생으로, 1975년에 『월간문학』에 수필이 당선되었고, 1916년 『현대문학』에 수필 추천을 완료하였다.  현재는 한국문협 수필분과 회장 및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계간 수필 전문지 『선수필』을 발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만나면서 떠나면서』,『모래알 이야기』,『달빛 고요』,『깨어 있는 자만이 숲을 볼 수 있다』,『대금 산조』,『별 보며 쓰는 편지』,『가을 금관』,『마음꽃 피우기』,『실크로드』,『침향』,『마음 고요』 등.


 

 

 

 

 

정목일은 한국적인 서정을 재발견하고 음미하고자 아름답고 명상적인 글들을 꾸준히 써온 이 시대의 대표적인 수필가이다. 故피천득 선생도 작자가 27년 동안 한결같이 서정수필의 광맥을 캐오며 우리 수필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음을 치하한 적이 있다.

 삶을 통찰하고 반성하는 부드럽고도 준엄한 작가의 시각을 따라가며 독자들은 그의 미문(美文)에도 감탄하게 된다.

 그의 작품들의 주된 정서는 선(禪)이다, 연꽃과 풍경, 처진 소나무, 향나무가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 정화수를 떠놓고 기구하던 어머니의 모습, 침향을 비벼 향을 더한 차 등의 소재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작가의 수필집 <마음꽃 피우기>를 읽어보니 그는 주변에 널린, 평생 한 번 호명이 될까 말까한 작은 풀꽃들에 대해서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박한 서민이 무심결에 던진 말이 이름으로 굳어졌을, 그저 외롭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고 제 일생을 온전히 꽃피우는 걸 보며 그는 감탄한다.

 모든 문학은 본질상 시(詩)라는 사실은 문학이론의 기초다. 그러므로 소설도 시이고 수필도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문은 운문의 운율 문학이 아니다. 서양의 에세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독자적인 새로운 문학 양식으로 진화한 문예수필에서 비로소 '산문의 시'의 실체가 들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정목일의 <대금 산조>는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대금 산조>는 분명 운율문학의 시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시이다. 운문의 시가 아닌 것이 분명함에도 그러나 분명 한 편의 시 작품인 이 산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산문의 시>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즉 수필 작법은 몇 개의 상들을 묶어서 하나의 심상이 되게 하여 풀어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정목일의 <대금산조>야 말로 바로 몇 개의 상들을 묶어서 그가 감동받은 바로 그 대금 산조라는 하나의 창조적 상을 형상화하여 산문으로 풀어내고 있는 '산문의 시' 양식 바로 그것이라고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창조적인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