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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제갈량(諸葛亮)은 정말 베트남(Vietnam)을 칠종칠금(七縱七擒)했을까?

by 언덕에서 2011. 6. 25.

 

 

제갈량(諸葛亮)은 정말 베트남(Vietnam)을 칠종칠금(七縱七擒)했을까?

   

 

19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민 300여 명이 모여 중국의 주권 침해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는 지난 5일부터 매주 일요일 열리고 있다. [하노이 AP=연합뉴스]

 

 

 

제갈공명 ‘칠종칠금’ 무대의 땅 역사 속 베트남 <중앙일보 2011. 6. 21자)

 

 외세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베트남의 저항력은 역설적으로 숱한 외세의 침략과 피지배의 역사에서 나왔다.
 베트남은 역대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겪으면서도 독립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맹획과 대결해 ‘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이라는 말을 남긴 남만(南蠻) 지역이 지금의 베트남 땅이다. 당나라는 남벌(南伐)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략한 후 안남(安南)이라고 불렀다. 안남은 ‘남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트남은 한족·몽골족·여진족이 중국 땅에 세운 나라에 복속돼 자치를 보장받는 대신 조공을 바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 국호인 베트남도 청나라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 원(元)씨 왕조가 국호를 남월(南越)이라고 정하려고 했지만 청나라의 압력으로 월남(越南)으로 국호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월남의 현지어 발음이다.
 19세기 말에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1954년 프랑스를 몰아냈다.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베트남은 59년 미국의 통킹만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 끝에 통일을 이뤘다. 중국과 국경 마찰을 빚었던 베트남은 79년 중국의 침략을 받아 북쪽 국경에서 전쟁을 벌였다. 88년 3월엔 중국이 기상관측을 이유로 난사군도 6개 섬을 점령하자 5월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위의 기사에는 제갈량이 원정한 남만지역이 지금의 베트남 땅이라고 단정적으로 쓰고 있다. 이는 삼국지의 내용에 기인한다.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의 50%이상은 허구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삼국지의 역사적 근거가 없는 황당한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동남풍이나 초선, 적토마…….

 그러나 그중의 대표적 뻥튀기의 꽃은 제갈량의 남만정벌이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인 맹획이 등장하는가 하면 제갈량은 촉나라가 삼국 중 가장 약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원정하여 각국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심한 허구인데 문제는 알만한 신문기자들까지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점이다.

 

<제갈량 : 촉나라의 국력이 약했던 관계로 위나라와 대치만 하다가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그 허구를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나관중의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남만정벌의 개요는 이렇다.

 

 유비가 죽고 난 후 유비의 아들 유선을 모시며 촉나라를 다스리던 제갈량은 삼국통일을 도모하던 어느 날 남만(南蠻 : 인도차이나 반도)을 정벌하기로 결심한다. 건흥 3년(225) 남만왕 맹획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경계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여러 중신들은 제갈량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남만이 충분히 왕화(王化)되지 않았다며 친히 장완, 비위, 조자룡, 위연을 데리고 정벌에 나선다. 남만의 태수인 고정을 투항시킨 제갈량은 남만 깊이 진격해 들어간다. 제갈량의 참모인 마속은 "남만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고 산세가 험한 곳이니 항상 반란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라고 권하고 제갈량은 남만의 왕인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번번이 다시 놓아주자, 맹획은 감격해서 제갈량에 투항하고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칠종칠금). 이것으로 제갈량의 남만(인도차이나 반도) 정벌은 끝이 난다.(삼국지 87~90회)

 

이문열 번역 삼국지 삽화에 등장하는 맹획 : 실존한 인물이 아니다.

 

 이것이 제갈량의 남만정벌 개요이고 위의 기사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사실은 어땠을까?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에서 하노이까지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대략 1천 킬로미터 거리이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온통 엄준한 산악지대이다. 산악지대에서는 전문 등산인들도 하루에 5킬로미터 이상 가기가 어렵다. 제갈량은 3월에 성도를 출발해 12월에 돌아왔으니 8~9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성도에서 하노이까지 직선거리로 왕복에 2천 킬로미터니 휴일 없이 하루에 8킬로를 걷기만 했다고 해도 여유 있게 잡아줘도 9개월이 걸린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사서(史書)나 베트남의 사서 어느 곳에도 촉나라의 인도차이나 반도 원정에 관한 기록은 없다는 점이다. 맹획 역시 실존인물이 아님은 물론이다.  (* 참고도서 : 이종호 저 -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김운회 저 - 삼국지 바로 읽기)

 그러면 제갈량의 남만정벌의 실체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제갈량은 겨우 성도에서 쿤밍(昆明, 현재의 구이저우 쿤밍) 정도를 다녀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쿤밍도 성도에서 직선거리로만 다져서 거의 300km나 떨어져 있는 곳인데다 역시 험준한 산악지역이어서, 제갈량의 원정 사실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역사학자들이 다수이다.

 결국 양쯔강 건너편을 남만(南蠻), 즉 남쪽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중화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심하게 보인다.

 쉽게 말해서, 촉나라의 국경에 가까운 양쯔강(양자강) 남안(南岸) 정도를 정벌한 것을 가지고 <남만정벌>이랍시고 떠들면서 마치 중국 남쪽에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각 나라들을 정벌한 듯이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고사어를 만든 중국인의 허풍이나 그것을 그대로 믿고 사용하는 우리나라 언론사나 한심하기는 매일반으로 보인다.

 

많은 작가들이 칭송하는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맹획의 캐릭터.

중국의 만주 본계호에서 태어나서 자란 탓인지 고우영 화백 역시 맹획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세력을 키웠던 왕이라고 믿은 듯하다. 

 

 

 중국 삼국시대의 촉나라는 위의 중국지도에 나오는 사천성 지방에 위치했다. 실제 나라 크기도 현재의 사천성 정도로 추정되는 아주 작은 나라였다. 그래서 혹자는 삼국지가 아니라 2.5국지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다. 촉나라의 국력이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그만큼 왜소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위의 사천성 성도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운남성의 곤명 지역에 원정을 갔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史實)이다. 중국인은 그걸 갖고 <남만원정>에다 <칠종칠금>이라고 허풍을 부리는 민족이다. 아래의 지도를 보자. 삼국지라는 황당한 소설을 읽으면 아래의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 인도네시아 각국들을 완전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까지 믿고 있다.

 

위키백과에 그려진 262년의 삼국 세력도, 위나라가 한반도 중부까지 점령해 있고, 오히려 오나라는 베트남 북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엉터리 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