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중국 문학가 / 사상가 루쉰

by 언덕에서 2011. 4. 21.

 

중국 문학가 / 사상가 루쉰(魯迅. 1888∼1936)

 

 

 

중국의 문학가ㆍ사상가. 동아시아 리얼리즘문학의 거봉. 자 위차이(豫才). 루쉰은 대표적인 필명. 본명 저우수런(周樹人)이고 루쉰은 필명이다. 반제 반봉건의 문학운동을 전개하면서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1백 가지 이상의 필명 가운데 하나가 루쉰이다. 첫 작품을 이 이름으로 발표했고, 후기의 주요 작품들과 작품집을 이 이름으로 출간했기에 루쉰이라는 필명이 고정화되었다.

 저장성 사오싱(紹興) 출생. 지주 집안 대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조부의 하옥(下獄), 아버지의 병사 등 잇달은 불행으로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弘文學院)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성 개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다.

 그 무렵 유럽의 피압박민족 및 슬라브계 작품에 공감하여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역외(域外) 소설집>을 공역하는 한편, 망명 중인 장빙린(章炳麟)에게 사사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금석탁본 수집, 고서 연구 등에 심취하였다. 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광인일기>를 발표하여 가족제도와 예교(禮敎)의 폐해를 폭로하였다.

 이어 <공을기(孔乙己)><고향><축복> 등의 단편 및 산문시집 <야초(野草)>를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대표작 <아큐정전>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창작 외에도 많은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의 교단에 섰다. 24년 저우쭤런과 어사사(語絲社)를 조직하고, 25년 청년문학자와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으나, 북양군벌의 문화 탄압과 격돌한 학생운동 3ㆍ18 사건으로 베이징을 탈출, 아모이대학(厦門大學)ㆍ광둥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27년 가을 상하이의 조계(租界)에 숨어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창조사(創造社)․태양사(太陽社)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룹 및 신월사(新月社) 등 우익적 그룹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단평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30년 좌익작가연맹이 성립되자 지도적 입장에 서서 활약하고, 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또 이 해부터 판화 운동도 지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죽기 직전에는 항일투쟁 전선을 둘러싸고 저우양(周揚)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대체로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이 없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의 저작은 일찍이 <루쉰전집>(20권, 38), <루쉰 30년집>(10권.41)으로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도 상세한 주석을 가한 또 다른 <루쉰전집>(10권.56∼58)이 간행되었다.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처녀작 <광인 일기>는 중국 근대소설의 효시이며 <아큐 정전>은 노신을 세계적 작가로 만들었다. 소설 <고향>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노신은 중국 절강성 소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13세 때 학자였던 조부가 정치적인 일로 투옥되면서 집안이 몰락한다.

 18세 때 남경으로 가서 수사학당을 거쳐 철도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적 학문에 접한다. 당시 중국에는 근대화 정신이 널리 퍼져 있었고, 노신은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 후 관비(官費)로 일본에 유학했고 의학전문학교를 2년 동안 다니기도 한다.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그는 정신의 개조가 보다 중요함을 깨듣고 의학을 버리고 문학을 선택한다. 그는 사범학교 교장을 거쳐 교육부 관리로 일하면서 [신청년]에 처녀작인 <광인일기>를 발표한다.

 동아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거봉. 우리에게는 <아Q정전>과 <광인일기>라는 중단편을 쓴 작가 정도로 기억되며 세계문학전집의 말석에 겨우 한 자리 마련해 줄 정도의 대접만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근대 작가를 저울 한 쪽에 올려놓고 다른 한편에 루쉰 한 사람을 올려놓고 저울질을 해보는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혁혁한 문학적 사상적 성과를 올린 작가다.

 일본의 의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노ㆍ일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중국인의 목을 일본 군인들이 자르고, 그 둘레를 가득 매운 동포 중국인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만난듯 즐겨 하는 모습을 환등기 사진으로 접하면서 루쉰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현대 의학으로 중국인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중국 민중의 정신적 타락과 무기력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자각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에 복무하기로 결심한다.

 루쉰은 데뷔작 <광인일기>를 통해 중국의 봉건적 유교 사상과 정치사회체제를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체제에 비유했다. 체제의 억압자들이 가해자로서 동포를 먹을 뿐 아니라, 피해자인 중국 민중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가해자라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좌파에 속한 문필가였으나, 중국 민중의 정신적 불구상태를 추호도 미화함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많이 써냈다. 먼저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그 어떤 긍정적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는 투철한 리얼리즘 정신의 반영이었다.

 그의 소설과 잡문들은 강한 휴머니즘과 민족애에 바탕하면서도 그 메시지가 인위적으로 불거지지 않고 작품의 미학 속에 완벽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때로는 글이 아니라 칼로 여겨질 정도로, 일체의 사정 봐주기나 체면치레 없는 공격적 글을 토해내는가 하면, 때로는 여느 서정문학의 대가 이상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애절한 글들을 써냈다.

 봉건 군벌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지지하다 지명수배를 받는가 하면, 뜻이 맞는 동료들과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구세력의 복고 움직임에 대해서는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유명한 평론으로 공격했으며, 대장정을 떠나는 중국 홍군에게 '당신들에게 인류와 중국의 미래를 건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936년 10월 19일 새벽 5시 25분 상하이에서 병사했으며,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민족혼'이라 새긴 명정을 관에 덮은 채 만국공동묘지에 묻혔다.

 

 

 저서는 다음과 같다.

 <광인일기>(1918) <아큐정전>(1921) <루쉰전집>(20권.1938), <루쉰 30년집>(10권.1941) <루쉰의 편지><노신선집 2>(1991) <무덤><중국소설사략><꽃띠문학><달로 달아난 항아><나를 사랑한 작은 절망><투창과 비수><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들풀><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아침꽃을 저녁에 줍다>